2008년 10월 30일 목요일

폴 비릴리오 /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 현대예술의 위기 그 시지각의 소멸에 관하여 / 폴 비릴리오


그의 글을 읽으면 푸주칼이 떠오릅니다. 노련한 도살자는 짐승의 뼈를 다치지 않게 살을 발라낸다는 말이 있는데, 비릴리오에게도

어울리는 비유일듯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슷하게 말하자면, 푸코는 회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과거를 되살려내어 현재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들어내는 시각은, 아직 살아있어 보이는 싱싱한 요리를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냅니다.

아직은 그가 발라낸 살을 보는 건 난감합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끔찍하게 여길 수도 있어요. 마키아벨리의 글은 잘 단련된

남성의 근육을 닮았다고 누군가 말한 기억이 나는데, 그걸 좀 고쳐말하면 비릴리오에겐 죽은 사람의 근육이 보이거든요.

 

하나의 책을 다 읽었을 때, 여운처럼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 때가 있는데, 이 책의 경우에는 한 알의 사과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과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잘 만들어진 환영이기 때문입니다. 묘사도 완벽하고, 촉감과 무게도 느낄 수 있고, 심지어

깨물었을 때 과육의 맛이 느껴지고, 깨문 자국이 남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간장처럼 금세 재생되어 버리죠...

책을 덮고, 그런 사과를 손에 쥐고 말해봅니다.

그럼 이 다음에는 무엇?

그 사과가 지구만한 크기라면, 또 무수한 자신의 미니어쳐와 같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확대를 하거나 축소를 해서 보아도

똑같이 보인다면, 어느 방향과 어떤 시간에서 보아도 똑같다면, 그런 이미지가 비릴리오가 말하는 현대에 대한 캐리커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그 안에 갇혀있는 벌레쯤 될까요?

 

이 책은 비릴리오에 익숙한 독자라면 많이 들어봄직한 저자만의 용어들이 거침없는 문체로 총동원되는데, 과학기술과 각종 미디어

의 발전으로 소화불량에 빠진 현대예술에 대한 해부학적인 진단입니다. 동시에 예술이 그 시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목소리를 대변

하는 소통 매체라는 점에서 기술의 변화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사상적 기반을 형성시키는지, 또 그것이 올바른지

반성의 계기를 주는 건강검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미디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대신하는 매개물이면서도 우리 사고 습관에 가담한다는 말도 일상적

입니다. 과거에는 본다는 행위에서 기회비용이 뒤따라야만 했다면, 이제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오로

지 서비스 받는 고객으로서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불한 것은 어쩌면 주체성은 아닐지. 또한,

나라는  이름을 제외한 모든 것과의 차이를 인식하고 극복하는 매체가 예술과 정치로서, 저자에게는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우리는

주체와 대상 간에 시간차가 제로에 근접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손쉽게 전지적인 시점을 얻을 수 있어요. 외국의 대사관 사이

트를 방문한다면, 80초안에 세계일주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인의 큰 발걸음이 아니라 아주 작고 재빠른 전기 신호의 진동

입니다. 우리에 게 그런 간극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보여질까(존재할까)에 대한 의문은 어떻게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일상적인 소통 수단으로 전달이 어려운 내용을 위한 대안으로서 예술을 바라보기에, 점차 1인 미디어가 기술적으로 손쉬워진 현시

대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저로서는 저자의 염려가 복고지향적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핵폭탄과 같은 수준으로

보는, 통제불가능할 정도로 마구 팽창하고 있는 기술의 산물로 웹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데 말이에요.

중생대 공룡이 호흡했던 공기를 지금 자신이 마신다고 느꼈던 시인의 상상력이나, 파리의 밤에 빛나는 모든 창문들 안에서 일어나

는 사건들을 남김없이 서술하고 싶어했던 자연주의 작가들의 소망은 충분히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수십억 인구 중에 하나

라는 걸 알지만, 동시에 어디로든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웹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주 미소한 시점과 전지적인 시점의

동시성. 저자에게 그런 상황은 빅브라더가 불필요할 정도로의 권태감에 빠질 위험으로 보이나 봅니다.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조차

귀찮다고. 다만 가끔, 지배자가 된듯한 기분으로 세상의 환영을 둘러보는 경험으로 만족하니까요.

 

이제 예술은 이상적인 것에 대한 모방이자 예언이 아니라, 문명이 이룩한 기술이 대중화 직전의 임상실험으로써 혹은 비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자가치료법의 하나일 뿐일까요. 이 완벽해지고 있는 현실의 시뮬레이션에 다소

지루함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에게 비릴리오는 의문거리와 자극제를 함께 줄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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