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세계의 모든 비참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것에 대해 말하고, 그것과 함께 말하며, 그것과 같이 이름들, 독특성들, 새로운 다수성을 발명하는 말하기의 특별함에 눈뜨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는 평등을 측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 측정은 가까움과 멂을 조절하는 기술이다. 여기에서 실험되는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늘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하는 식으로 행동하라. 이는 곧 끊임없이 측정하고 평가하고 매번 이 가까움과 멂 - 이것들은 평등한 공동체의 틈새들을 정의한다 - 을 재창조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다. (P.213)
모든 표현들은 허영과 체증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누군가 고향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듯 '가장자리'라는 말에서 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부서진 것은 그저 쓸쓸해 보일 뿐이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상태는 사랑스럽다. 간지럽지만, 기본적으론 낭만주의자인듯. 누군가의 현 상태보다는 그가 당시 바라보고 있던 풍경에 따라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결정된다. 나에겐 그 사람과 그가 보던 풍경이 겹쳐 보인다. 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짤방에 대한 경험과 같은 맥락.
지난 대선에서 난 이회창을 찍었다. 현 정세와 국가의 미래를 냉철히 분석한 결과...일리가. 그저 그에게 보인 낭만적 보수주의라는 아우라가 좋았다. 최소한 국민과의 소통을 공문서에 결제하는 것 쯤으로, 환경문제를 마천루에 옥상공원을 조성하면 해결된다는 것 쯤으로, 경제문제를 한국이라는 나라를 구조조정 잘 된 기업으로 만들면 잘 풀릴 거라는듯, 그렇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었다. 난 그런 세상이 만들어진다면 국가보다는 기업을 택하련다. 차라리 기술적 오타쿠들이 모인듯한 구글같은 나라로. 자본주의의 장점은 심플한 디자인에 감춰진 치밀한 기술과 생산자의 프로세스를 만져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좋은 국민보다는 좋은 사원이 멋있어 보인다. 연예계나 스포츠계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유명인들은 치어리더쯤 되겠지. 기본적으로는 군중에 의해 휩쓸리는 체제보다는 엘리트주의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능력한 독재보다는 아나키가 낫다고 생각한다. 난 정치에 대해 냉소적이며, 유능한 1인자에 의한 통치와 소국과민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그건 셀프컨트롤할 경우도 다를게 없다. 나에게 가장 큰 신뢰감을 줄 수 있는 팩트는 결국 나 자신 뿐이니까.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내한했다는 소식으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난 그때 메를로 퐁티의 미완성 책을 슬슬 문학으로 접근해야겠다며 후퇴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그 보다 한두달 전 비릴리오의 신간을 읽었을 때 분노 가득한 문장에 수긍하면서도 내심 조금 당황했던 이유를 찾고 있었다. 낙관적인 니힐리스트 기질에 찌들어 있다는 변명은 지겨웠다... 어쩌면 나는 내 안의 허무와 파괴충동 사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싶었는지도... 가령 이런 갈등일까? 파괴할 가치도 없는 세계 VS 무언가 파괴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실감이 나지 않는 자신.
문자 위주로 되어있는 책에서, 정보가 집약된 형태를 제외한다면, 재미있는 소설은 위안이 되고, 아름다운 시는 벗의 편지가 되어준다. 그리고 철학은... 내겐 무기가 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관상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무겁고 오히려 위험이 더 크니까. 가령 푸코나 크리스테바는 각각 세상과 나 자신을 향한 메스가 되어 주었다. 물론 주장하는 개념의 디자인에 매료되거나 읽는 행위만으로 몰입하게 되는 문체도 있지만, 그 역시 막연히 나와 코드가 맞을 거라는 예감이 깔린 상태에서나 가능할 거다. 그는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매료된 건 그의 사상의 외양이나 목소리 때문이 아니다. 간혹 철학책을 읽으면 머리 속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기존에 사용하던 단어들에 낯선 의미들이 중첩되고, 익숙하지 않은 개념과 단어들이 연결되고, 익숙한 단어들의 경우에도 볼륨과 주파수를 재조정해야한다. 그래서 난 아예 보이지 않던 것들을 새로 그려서 설명해주는 느낌을 좋아한다. 기존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특히 구조주의 느낌나는 책들에게는 그 치밀함에 치가 떨리기도 한다. 그건 내게 신경질과 집착으로 와닿는다. 뭐하러 낡은 세계를 더 괴롭히는 걸까, 차라리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내가 함부로 온갖 사물들을 환유시켜버리는 성급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보면서 들었다.
이 책에서 들고 있는 사례들은 꽤나 현세적이며, 끌어온 개념들은 꽤나 고전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풀어내는 방식은 꽤나 현상적이다. 학자로서 영악한 포지셔닝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어쨌든 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지금껏 정치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상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정말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권력은 경계 지역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채널을 돌리다가 타국의 전쟁 참사 뉴스를 지나치는 것처럼 심드렁하다. 또 국가를 그저 나보다 힘센 개인처럼 여기는 것, 평등이란 국가에 비해 모두가 평등한 것, 자기 몫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자유 등등. 누군가 말하던 허울 좋은 공동의 정의와 개인의 증오에 대해선 침묵한 채 곧 버려질 포장지 같은 대의. 내가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쳤던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이 지나쳐버렸던 틈새들을 어떻게 벌려놓을 수 있는지, 그곳에 어떤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이 말해질 때 어떤 그림이 나타날지 그는 보여주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정치에서 권력을 분리시켰다는 느낌. 권력에 집착하지 않아도 정치가 가능할 것만 같은 환상. 그것이 철학의 영역 확장을 노리는 걸까, 라는 의심도 들긴 하지만. 최소한 나에겐 적용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그건 '적'과 같은 형태로 구현되겠지만.
어떻게 보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은 오지만, 여전히 내 포지션에 대해서는 애매하다.
물론... 난 보이는 것에 끌려가는 타입이니 내가 어떤 영역에 있을지 과연 타인 혹은 이 세상과 합의가 가능할지는 차후 문제겠지만.
그에 대해서는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인용구는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누군가 고향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듯 '가장자리'라는 말에서 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부서진 것은 그저 쓸쓸해 보일 뿐이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상태는 사랑스럽다. 간지럽지만, 기본적으론 낭만주의자인듯. 누군가의 현 상태보다는 그가 당시 바라보고 있던 풍경에 따라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결정된다. 나에겐 그 사람과 그가 보던 풍경이 겹쳐 보인다. 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짤방에 대한 경험과 같은 맥락.
지난 대선에서 난 이회창을 찍었다. 현 정세와 국가의 미래를 냉철히 분석한 결과...일리가. 그저 그에게 보인 낭만적 보수주의라는 아우라가 좋았다. 최소한 국민과의 소통을 공문서에 결제하는 것 쯤으로, 환경문제를 마천루에 옥상공원을 조성하면 해결된다는 것 쯤으로, 경제문제를 한국이라는 나라를 구조조정 잘 된 기업으로 만들면 잘 풀릴 거라는듯, 그렇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었다. 난 그런 세상이 만들어진다면 국가보다는 기업을 택하련다. 차라리 기술적 오타쿠들이 모인듯한 구글같은 나라로. 자본주의의 장점은 심플한 디자인에 감춰진 치밀한 기술과 생산자의 프로세스를 만져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좋은 국민보다는 좋은 사원이 멋있어 보인다. 연예계나 스포츠계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유명인들은 치어리더쯤 되겠지. 기본적으로는 군중에 의해 휩쓸리는 체제보다는 엘리트주의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능력한 독재보다는 아나키가 낫다고 생각한다. 난 정치에 대해 냉소적이며, 유능한 1인자에 의한 통치와 소국과민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그건 셀프컨트롤할 경우도 다를게 없다. 나에게 가장 큰 신뢰감을 줄 수 있는 팩트는 결국 나 자신 뿐이니까.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내한했다는 소식으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난 그때 메를로 퐁티의 미완성 책을 슬슬 문학으로 접근해야겠다며 후퇴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그 보다 한두달 전 비릴리오의 신간을 읽었을 때 분노 가득한 문장에 수긍하면서도 내심 조금 당황했던 이유를 찾고 있었다. 낙관적인 니힐리스트 기질에 찌들어 있다는 변명은 지겨웠다... 어쩌면 나는 내 안의 허무와 파괴충동 사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싶었는지도... 가령 이런 갈등일까? 파괴할 가치도 없는 세계 VS 무언가 파괴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실감이 나지 않는 자신.
문자 위주로 되어있는 책에서, 정보가 집약된 형태를 제외한다면, 재미있는 소설은 위안이 되고, 아름다운 시는 벗의 편지가 되어준다. 그리고 철학은... 내겐 무기가 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관상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무겁고 오히려 위험이 더 크니까. 가령 푸코나 크리스테바는 각각 세상과 나 자신을 향한 메스가 되어 주었다. 물론 주장하는 개념의 디자인에 매료되거나 읽는 행위만으로 몰입하게 되는 문체도 있지만, 그 역시 막연히 나와 코드가 맞을 거라는 예감이 깔린 상태에서나 가능할 거다. 그는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매료된 건 그의 사상의 외양이나 목소리 때문이 아니다. 간혹 철학책을 읽으면 머리 속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기존에 사용하던 단어들에 낯선 의미들이 중첩되고, 익숙하지 않은 개념과 단어들이 연결되고, 익숙한 단어들의 경우에도 볼륨과 주파수를 재조정해야한다. 그래서 난 아예 보이지 않던 것들을 새로 그려서 설명해주는 느낌을 좋아한다. 기존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특히 구조주의 느낌나는 책들에게는 그 치밀함에 치가 떨리기도 한다. 그건 내게 신경질과 집착으로 와닿는다. 뭐하러 낡은 세계를 더 괴롭히는 걸까, 차라리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내가 함부로 온갖 사물들을 환유시켜버리는 성급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보면서 들었다.
이 책에서 들고 있는 사례들은 꽤나 현세적이며, 끌어온 개념들은 꽤나 고전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풀어내는 방식은 꽤나 현상적이다. 학자로서 영악한 포지셔닝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어쨌든 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지금껏 정치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상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정말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권력은 경계 지역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채널을 돌리다가 타국의 전쟁 참사 뉴스를 지나치는 것처럼 심드렁하다. 또 국가를 그저 나보다 힘센 개인처럼 여기는 것, 평등이란 국가에 비해 모두가 평등한 것, 자기 몫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자유 등등. 누군가 말하던 허울 좋은 공동의 정의와 개인의 증오에 대해선 침묵한 채 곧 버려질 포장지 같은 대의. 내가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쳤던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이 지나쳐버렸던 틈새들을 어떻게 벌려놓을 수 있는지, 그곳에 어떤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이 말해질 때 어떤 그림이 나타날지 그는 보여주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정치에서 권력을 분리시켰다는 느낌. 권력에 집착하지 않아도 정치가 가능할 것만 같은 환상. 그것이 철학의 영역 확장을 노리는 걸까, 라는 의심도 들긴 하지만. 최소한 나에겐 적용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그건 '적'과 같은 형태로 구현되겠지만.
어떻게 보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은 오지만, 여전히 내 포지션에 대해서는 애매하다.
물론... 난 보이는 것에 끌려가는 타입이니 내가 어떤 영역에 있을지 과연 타인 혹은 이 세상과 합의가 가능할지는 차후 문제겠지만.
그에 대해서는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인용구는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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