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8일 목요일

말라르메를 만나다, 폴 발레리, 김진하, 문학과지성사, 2007

 

지금이라면 말라르메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건조함과 치기를 이제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로이진 머피의 모로코가 나에게 샤베트라면 말라르메의 시는 나에게 크림이다. 둘 다 딱 그 온도, 더운 날씨에 금세 녹을 상태로 먹어야만, 혹은 자기도취처럼 따뜻한 방 안에서 맛보는 변덕.

여전히 나는 그를 오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스로는 발레리, 그 보다 더 좋아하지 않는 베를렌과 더 가까운 영혼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폴리네르의 유치함과 랭보의 청춘과 보들레르의 오만함을 아직 좋아하지만, 이제는 그들로도 나를 위로할 수는 없게 되었다. 고작 위로 받고 싶은 게 내 본심인 걸까...?

반면 내 또다른 본심은 말라르메를 어렵게만 여기고 있었다. 사실 예전에 난 그가 멀리서나마 보고 있던 풍경, 추구하는 목적에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과정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풀 수 없는 방정식, 그렇지만 난 어떤 기교라도 꺾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걸 쏟아낼 때가 자기 생명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내 삶이 변하고, 내 아름다움이 짓밟힌 다음에야 나는 감정의 약소함을 깨닫게 되었다. 말라르메를 바라보는 발레리의 시선에서 난 또다른 나를 보는 것만 같고, 지금껏 억눌렸던 내가 조금씩 기운을 내고 있다는 걸 느낀다. 물론 그 역시 내 완벽한 거울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난 이미 아무것도 아닌데, 무엇이든 어떠리... 이것은 도피가 아니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을 진심으로 긍정하듯, 나는 내 또다른 나를 긍정한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나를. 그때 오히려 나는 자유롭고, 내가 다시 젊어졌다고, 이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해서는 포기했다. 아니 여력이 없다고 해야 옳을 거다. 난 발레리의 엘리트주의도 싫지만, 쉽고 매혹적인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둘다 코미디. 그런데 웃기려고 애쓰는 개그보다 더 보기 싫은 게 있나. 나를 농담삼아 갖고 노는 버릇은 버리지 못할테지만, 또 그 정도가 딱 내가 타인에게 보여줄 재미의 대부분이겠지만... 나머지는 단정한 호러일 뿐이니.

왜냐면 새로운 감정, 구조, 상징은 언제나 나에게 공포로 먼저 체감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건 언제나 권력이었고, 내가 부르던 노래는 언제나 연애시였고, 내가 보여주던 건 언제나 전쟁이었다. 그저 심심할 뿐이다, 평화라는 건.

내게 평화는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것. 그렇게 도구의 장점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내 기존 장점을 발휘시켜 줄 동시에 새로운 장점을 발견해 줄 도구를 사용하는 것. 그런 것에 몰입하는 시간. 나를 진짜 기계로 다뤄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를 사랑할텐데. 그 외에는 어떤 기다림도 없다.

 

아직 공간에 대해선 말할 여력이 없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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