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0일 목요일

베레니체의 미투데이 - 2009년 8월 20일

  • FF13 : 후아.(final fantasy promotion site 스크랩)2009-08-11 10:16:42
  • Through me, with me, in me, in the unity of the Spirit, all glory and honor is yours, for ever and ever.(Eucharistic siki)2009-08-11 16:54:33
  • sub 님으로부터 감염된 것만 같아….(me2Virus)2009-08-14 11:47:25
  • Pastel Music 7th Anniversary Festival : 9월 27일!(파스텔뮤직 Google Reader 도나웨일 donawhale 공연 concert)2009-08-15 06:24:30
  • 확실히 이때의 권력은 발현되는 순간에 있구나 모럴 없이 그저 촉각적인(me2mobile diary)2009-08-15 22:25:42
  • 미투는 글감되는 것들이나, 동영상 스크랩. 블로그는 글감들 감상문 위주. 재밌는 페이지는 일단 구글리더로 스크랩. 텀블러는 개인적인 글쓰기 혹은 개인적 취향의(;;) 이미지나 영상 모음. 트위터는 관심태그 중에서 RT하기. 저도 메신저는 거의 안 쓰게 되더군요.(web diary)2009-08-18 18:02:44
  • múm - Dancing Behind My Eyelids(Go Go Smear the Poison Ivy múm music video Dancing Behind My Eyelids vimeo 스크랩)2009-08-18 21:45:58
  • 설탕보단 초콜릿 초코보단 카라멜 / 밥보단 빵 그보단 떡(diary me2mobile 취향 조삼모사)2009-08-19 18:57:16
  • 내가 아직 본성을 믿는 이유는, 절대로 좋아할 수 없는 감수성이 있기 때문. (수준이나 병맛의 레벨 무관하게)(취향 diary)2009-08-20 02:46:53
  • 요즘 딴지일보가 재밌어졌다;(잉여 중흥 딴지)2009-08-20 12:11:12
  • 재미있겠네.(me2movie 썸머 워즈 스크랩)2009-08-20 14:59:17
    썸머 워즈
    썸머 워즈
  • 재미…라기 보단, 필요하겠네.(me2movie 나무없는 산 스크랩)2009-08-20 14:59:45
    나무없는 산
    나무없는 산
  • EXiS2009(EXiS 2009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스크랩 Naver Cafe)2009-08-20 16:29:00
  • 자기 이해해달라고 떼쓰는 것보단 적당히 꾸미는 것이 좋아졌다. 그게 스타일보다 형식이 되면 좋겠지. 그때 솔직함이란 자기 본성에 대해 까먹지 않는 정도겠지. 가치나 패턴을 잴 뿐이다. 당위성으로 존속되는 성격 없이, 타자에 대해 오만하거나 집착할 필요 없이.(성격 diary character)2009-08-20 21:11:52

이 글은 베레니체님의 2009년 8월 11일에서 2009년 8월 20일까지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베레니체의 미투데이 - 2009년 8월 10일

이 글은 베레니체님의 2009년 8월 6일에서 2009년 8월 10일까지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8월 5일 수요일

베레니체의 미투데이 - 2009년 8월 6일

이 글은 베레니체님의 2009년 7월 27일에서 2009년 8월 6일까지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8월 3일 월요일

형태의 탄생, 스기우라 고헤이, 안그라픽스, 2006

 

창조한다는 것. 시스템을 구축하고 원칙을 세우고, 모양에 힘을 불어넣는 일. 지금처럼 단어들을 엮어 흐름을 만드는 일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신, 국가, 사랑...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 앞에 모두는 평등하니까. 우리는 스스로의 가장 좋은 부분을(혹은 약한 부분을) 신에게 바친다.
안그라픽스의 책은 명성만큼이나 참 예쁘다. 그렇게 섬세하게 구석구석 신경 쓴 책을 보면, 난 응당 그에 걸맞는 섬세한 내용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책을 읽는 일에 있어서도 더 집중력을 쏫아 붓게 된다. 더 이상 메시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독되지 않는 의미들은 도처에 넘친다. 스스로를 알아달라고 유혹하는 사인들.
무엇을 택해야 할까? 난... 스스로를 공백으로 만들면 그들이 쏭아져 들어올 거라 기대했었다. 맞다. 내 호기심은 여전히 왕성하다. 스스로를 잃어버릴 만큼. 그렇게 계속해서 다른 가치들을 올려놓을 테이블이 되고 싶었다. 어떠한 선입견 없이.

 

그러나 한 사람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가치관'을 확립하는 게 아닐까. 국가가 시민에게 기대하는 것, 종교가 신도에게 기대하는 것, 연인이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
그들이 나에게 바라는 모습들,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 역시 일원적인 순수성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인지도.
세계라는 거울이 나를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순진함.
나르키소스 최후의 유혹.

 

그에 대처하려고 난 변덕을 추가시켰다. 단순히 지루해서 그랬던 건 아니야. 책임지기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고. 더 갖고 싶어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지. 내 변덕은 언제나 버릴 때만 발휘된다. 빈 자리가 채워질 거라는 기대를 무의식적으로라도 하고 있을까?
그들 믿음의 미약함을 몸소 실천해 보였을 뿐이다. 완전한 파괴 대신에 변덕으로 위안을 얻었을 뿐. 허무에 대한 의지는 나에게 분명 있지만, 그것이 지켜지려면, 그 공백이 공백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정말 번잡한 배리어가 필요하다.
이 책을 보며 난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단순히 문화적인 친근함 같은 '의미'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투명성'과 '반성성'이 공존하고 있는 현재 예술이나 웹의 흐름은, 종교나 정치와 같은 현실적인 시스템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로서 완전하지만 현실과 분리된 어떤 것. 그렇게 이분법적인 사고 패턴은 동서양 모두 있다. 다만 서양이 현실이라는 그림자 저편의 이상향으로 그곳을 완전히 분리시켰다면, 동양의 이 책의 카타치나 한국의 이기론, 중국의 음양처럼 현실에 상징 체계가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다신교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국민은 위계질서는 있지만 누구나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이 되어야 하나. 신화 속 신들은 자신들의 신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각자 책임지는 가치들이 있지. 그 정도로 책임져야 하는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거니와 신도를 만들어야 하는 귀찮은 짓거리를 해야하다니. 그런데... 이런 내 의지는 무슨 가치를 책임지는 걸까? 뭐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단순히 부정할 따름? 내 의지는 기존 가치들의 파괴 이상의 것은 해낼 수 없는 걸까.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난 생각했었다. 나 역시 내 행위와 의미를, 현실과 현실 너머의 것으로 분리시키고 있었어. 좋지 않아. 스스로를 실험체로 쓰는 거야 그렇다 쳐도, 그 일을 희생 제물 바치는 거랑 동격으로 여기는 거. 나 역시 종교에 매혹되었던 트라우마가 있고, 몇 년 간 정말 마음이 아팠을 땐 수도사나 될까, 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해도. 단순히 종교의 오라를 문화적 색채로 즐겨 보려는 건 나에게 위험한 방법이었다. 나 역시 잘 통제된 제국. 멋진 영웅의 의지가 발현되는 체계를 내심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내 기억에서 '왕'이라는 개념은 동양적인 거다. 여기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내 손에 닿지 않는 이상에 대한 충성이 신앙이 현실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그게 더 재밌어. 역사는 그러면서 만들어진다. 인간의 현실과 분리된 이상적 가치는 그걸 탓할 존재로 악을 만든다. 그 분리 행위 자체가 현실로부터 개입을 차단하는 수단일텐데. 네트워크의 주인은 권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권력이 조정해야 한다. 분리가 악의 소행이니까, 연결은 선한 것인가? 그런 믿음의 코드들은 종교나 예술이나 정치 모두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기존 세계를 완전히 부정해야 했던 시도들은, 결국 이 세계와 반대되는 일원적인 이상향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꼭 유일한 대안이고, 그들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대상이어야 했을까.
좀 더 작은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해. 단순히 서로를 지켜보는 걸로는 불충분해. 타인이나 규범들에 의지하게 되면, 그저 가만히 귀엽받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만일 그들의 기준이 변하게 되면?

 

난 그들에게 내 기준을 가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건 내 원동력이 될 수 없다. 내가 구현하려는 레이어는... 외양에 있어서는 전체와 부분이 서로 이어지고 순환되는 패턴이 될 거야.
아마 내가 부분에서 막힐 때 전체 틀에서 답을 얻고, 틀에서 막힐 때 세부 규칙에서 돌파구를 얻기 때문이겠지. 거기에 의미는 중요하지 않아. 그를 트리로 나타낼 수 있다면, 의미의 일관성은 없을 거야. 그게 내가 스스로에게 갖는 낯섦의 이유겠지.
이 책은 그런 패턴마저 얼마나 일관적일 수 있는지 보여줬어. 그건 역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그렇겠지? 좋은 관찰자(저자)를 만난 탓이기도 하겠지만, 프로세서의 의지도 강했을 거야. 난 의미 없이 해내고 싶고, 그러니까 지각에 상징을 담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즉 메시지와 형식은 분리 가능하다는 거야. 나도 상징은 즐겨 쓰지만, 좋아하지는 않아. 이제 내 상징은 기존 상징을 뒤트는 정도로밖에, 그런 저항은 기존 설정이 필요해. 그것만이 재밋거리라고 할 수 있는데, 난 왜 지겹지? 자기 부정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서?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젊어질 수 없어서 그래. 청춘을 에뮬레이트할 수 있어. 그런데, 신체를 에뮬레이트할 수 있을까? 그 간극을 즐길 수 있는 사람,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싫어졌어. 인간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의 짓거리와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되는 거야.

 

아직 난 베이컨이나 실레의 이미지가 좋아. 그러나 그들의 그림은, 징후나 결과일 뿐이지, 나에게는 과정이 될 수 없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그걸 극복해야 해. 워홀 같은 방법 말고. 뒤틀기 지겨워.
좀 더 비인간적인 방법을... 그러나 분명 인간이 갖고 있는 기질을. 또 그걸 유희라고 단정짓긴 어려워. 시작은 될 수 있겠지만.
끝을 내지는 못해. 그렇다고 비극 같은 파국은 제외한다.

 

그 끝이라는 건 내 생명을 말하는 거야. 그 이상의 증명은 불필요하다. 나 역시 가치를 재단하면서, 좋은 것을 선택하면서 시작했지. 하나에 충실할 수 있었던 건 옛날 얘기야. 이제 인간은 그렇게 곱게 자기 인생의 끝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참 고대의 이상이지. 그는 절대적인 속박을 깨면 각자에 맞는 가치를 스스로 택할 수 있고, 그런 가치의 화신으로 개인 대 개인의 마찰과 교환을 거쳐 점진적으로 인류가 풍성해 질거라 믿었겠지만, 이제는 현실의 속박이라는 것도 의미를 상실했고 개인이라는 단위도 무의미해졌어.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워 보이는 가치를 돌려가며 사용할 뿐. 그 무수한 링크가 다양성의 바탕이 될까? 누구의 다양함일까? 국가? 세대? 문화? 인간은 그저 밈을 위한 단말기야?

 

개인이라는 지루하면서도 낯선 단위. 더 이상 새로움이 불가능할 때 오히려 결핍과 미개함이 부각된다. 집단과 개인은 그렇게 엮임을 지속하면서, 그런 무리들은 다른 무리들과 격차로 구별되면서 나열되겠지. 보다 많은 가치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단위로서, 그리고 그와 같은 단위들과의 많은 링크를 소유한 개인들의 무리. 나도 거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어. 그런 레이어가 없으면 신체가 존재할 수 없어. 최소화를 바라기는 하지만...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너무 순진했어. 자기만의 환상에 너무 의지했어. 종교 같은 게 될 수 없는 환상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시야를 방해할 뿐인데.

 

내가 좋아했던 걸 스스로 부수는 이유는, 그게 나에겐 신체나 다름 없기 때문이지. 사람은 참 사소한 걸로 죽어버리기도 하지만, 재생도 쉽거든. 너무 반복되면 왜곡되니 문제지만.
아마 이 글은 이 책에 의해 스스로가 부서진 다음에 재배열되는 과정을 쓰려고 한 것 같아. 그러나 내가 하려는 방식에 이름을 붙이지는 못했어.
형태를 탄생시킬 정도의 믿음은 없는 거지. 그렇다고 안 믿는 걸 믿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감각은 낭비를 좋아할까? 그저 감각에만 솔직하고 싶은데... 왜 늘 정리되지 않는 기분이 들까? 감각에는 주체가 없기에? 욕망만이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솔직함을 빌미로 욕망에만 충실한 것 따위 제일 저질이라 생각하는데. 

 

@08.01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8월 2일 일요일

헬베티카, 오브젝티파이드, 게리 휴스티잇

투명성 | 개성
인터랙션 | 정치적인 것

 

어쩌면 양분할 가치로는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 바탕이 대량생산에 있는 점은 분명.

 

어쨌든 편집의 묘미가 멋진.

 

스스로의 좋은 관객이 되는 것(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쓰는 것.

 

  • 나 역시 불필요한 걸 떼어내 버리려 했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
  • 나에게 제약이 있다면, 오로지 개인적인 진실에만 의존한다는 것.
  • 기억에 의지하지 않은 산업디자인은 그래봐야 미술계야. 물론 예술이 산업보다 더 자유롭다는 건 인정해.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Scene의 이동이 아닌 것 같다.
  • 나 역시 모더니티가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적 제스처라는 건 인정해. 그렇기에 모더니즘은 언제나 영웅이 필요하지.
  • 이제는 지겹다 그 리바이벌. 영웅은 죽고 스타일만 남았을 때 - 최신의 기술은 이상적인데 여전히 인간은 살과 피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 일본적인 맥락. 객관적인 서정? 드러나지 않는 디자인에 역시 동의하고, 그게 내 천성에 맞는다는 것도 알지만... 너무 그게 수동적으로 보인다는 불안감.
  • 아울러 나 역시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는 기법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경우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걸 바라는 사람은 없지.
  • 이제 내 形 -  kata - 理를 어디서 어떻게 꾸며야 할지...
  • 무엇을 택해도 개성은 발현된다. 개성이 없어 보인다면, 거기 숨겨진 걸 찾아내는 것도 재미있겠지. 디자인은 정직해야 해.

 

그래도 모든 시각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 - 촉감이나 후각적인 - 좀 더 감각적인 것들이 강력해져도, 문학이 그래도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게 거짓말이기 때문이겠지.

난  거짓말 안 좋아해.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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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 시리즈, 노무라 미즈키, 학산문화사

 

문학소녀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세헤라자드 페티시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나 역시 문학인간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 민감하게 반응할 거다. 자신이 허무하다는 걸 인식한 다음에는 리터러시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아무나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순진하든, 계산적이든 어떤 의미로든 말이지.

 

하지만 리터러시에는 함정이 있다. 리터러시가 삶과 유리될 때, 그것은 키치가 된다. 손쉽게 변용 가능하면서도, 누구에게나 어울리고,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하는 좋은 것. 거기에서 눈을 돌려 특별함을 찾는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옷을 잘 입는 거랑 패셔너블한 게 같을까? 누군가에게는 적합해도 누군가에겐 과잉된 거다. 문학은 언어의 패션이다. 어조, 타이프, 문체, 진실성 뭘로 보든.

 

아마 그 대비 - 어떤 기준에 따라 나열될 수 있는 각자의 진실, 그 단계들의 경게선의 음영과 경계선에서 멀리 떨어진 각 단계의 중심부는 밝게 보이는 - 착시처럼.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할 시점이지만, 그것은 생략. 그 일은 조서를 쓰는 일만큼이나 번거롭다.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용서받거나 하고싶지 않으니 상관없어.

 

다만... 이제는 글쓰기가 다른 의미로 두렵다는 걸 말해야겠다. 전에는 쓰고나면 잊혀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쓰고나면 진실이 된다. 잊어야할 것들과 다짐해야할 것을 잘 구별 못 하겠어. 음각과 양각의 차이일까?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결국은 감정의 문제일까? 내가 음악으로 감정을 보충하듯, 과거에 나는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존재시켰지. 그건 아바타나 철학적인 근거로 삼는 식은 아니야. 세헤라자드의 말을 듣는 입장에 가까웠고, 점점 정말 존재 그 자체, 나라면 쓸 것 같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대신 써준 것만 같은 느낌에 중독됐지. 점점 팬으로서는 불성실해졌지만.

 

내가 그런 독자였기에, 작가로서 나 역시 독자를 믿지 않아. 아직 음악은 내 양식이지만, 책은 점점 먹을 게 적어져. 아마 쓰게 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거 같아서.

 

이 시리즈의 방식으로 쓰지는 못하겠지. 이 작가의 마음을 모르겠으니까. 작중인물에는 크게 공감해. 토오코x이노우에 커플의 모습은 각기 내 반 정도를 나눠놓은 모습이라서 개인적으로는 더 눈물이 났지. 고전적 스토리의 패러디와 학원 미스터리와 동인 코드가 어우러져 있고, 텍스트의 플롯이나 볼륨은 물론 일러도 깔끔했지. 에필로그는 불필요했다고 생각하지만.

 

끝나버렸다는 게 내 심정이지. 작중인물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들켜버린 거야. 그럼 더는 그렇게 못하지. 그게 내 패턴인가봐. 확인되는 순간, 멈춰버리는. 개념주의를 긍정하면서도 그걸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확실히 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어. 그게 오히려 부정적인 면이 강조돼 버리니... 아슬아슬함을 즐긴다고 해야할까. 극복이 가능할 지는 모르겠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삶은 누구에게나 흘러가. 다만 너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다르니까 하는 말이야. 평범, 특별의 범주와 별개야. 네 스스로를 구속하는 가치들과는 무관해. 그래도 즐겁다면, 그게 진짜지. 그런 가지치기에 네가 관심이 없다면 상관없겠지만. 하지만 나 역시 별로 나무들을 사랑하지는 않는데...

 

만일 상징성이 강력하다면, 그것은 과거의 효용성을 차치하고서도 현재 시점에서도 바로 인식 가능해야 한다. 물론 그걸 본능이라던가 황금비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 보이지 않게 그 코드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가, 그런 문제. 그리고 그들을 담아내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게 과연 쓸모가 있을지 그런 문제.

 

@7월 25일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소리의 자본주의 - 전화, 라디오, 축음기의 사회사 | 요시미 순야

천재는 개념에서 이미 질린다고 하지, 또 누군가는 '개념'만으로 예술이 가능하다 했지. 형태를 갖추기 전, 형식만으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난 천재도 아닌 것 같고, 영감이 샘 솟든 항상 차올라 있지도 않아. 오히려 무언가를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표현하지 않았던 착상은 버리지 못한 사랑의 미련처럼 나를 사로잡는다. 결국 우유부단만 증명할 뿐. 그런 방식의 소통은 만인이 같은 높이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최소한 서로를 연결한 링크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게 지치고 있다. 원래 기대하지 않았어, 아니 그래서 더 지루함이 가속해서 나를 앞지르는 걸까. 내 감정은 내 이성과 얼굴보다 빨리 나를 캐치해낸다. 그럴 때 내 얼굴은 난처함.
이 비겁자!

 

마법 같은 음성 언어. 시와 노래와 대화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로부터, 문자에 주문이 각인되고 복제하는 수단 자체에서 눈에 보이는 조형성이 추가되면서, 문자 언어 역시 음성 언어에 전혀 꿀리지 않는 예술적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인쇄술의 발명 이후, 소리가 복제되는 기술이 등장할 무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이야기다. 꽤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녹음 기술이 자본주의를 촉진시킬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가치 교환은 가치 보존을 전제로 한다. 자본의 장점이자 단점은 쉬운 복제. 화폐는 은행으로부터의 빚이라고 하지? 하지만 최초의 복제는 코드로부터 시작했다. 그건 규칙성을 가진 신호.  다만 그 형태가 소리였고, 그것이 오래 유지하게 되면 신체적인 소리처럼 긴 소리로 주고 받게 되었을 뿐. 그때 소리는 이미지가 된다. 기계적인 변환을 거쳐 진동으로 되살아나지. 그걸 소리의 죽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거기서 출발한다. 어째서 살아있는 소리가 채집돼야 하는가.

 

문자가 권위를 가질 때, 소리는 저항의 수단이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구호를 외친다. 모든 것이 이미지로 바뀌는 현재에는 오히려 침묵이 더 효과적이지만. 가령 촛불시위에서 보이는 건 빛과 신체이지 거기에는 소리가 없다.
있더라도 강조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모두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면 전혀 주목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어떤 소리가 인상적으로 들리는 경우는 대비 효과 때문이다. 아마 나는 웅성거리면서 자유를 느꼈던 세대와는 다를 거다. 침묵을 저항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방법일지도. 사실 그게 저항인지 알지도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과거에는 그랬다. 소문을 타고 권력은 흔들렸다. 그건 지금의 언론, 웹의 담화들, 술자리의 안주로 늘 반복되고 있지만... 거기에 권위가 있을까. 사실 그 보단 진실이 있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저 게임으로 보이니. 그건 아마 내가 저잣거리의 소통 자체를 혐오했기 때문일 거다.
이 책에서 보여줬던 소리로 연결된 여러 비전들과 그들이 기술적으로 나타났을 때 함께 밝혀진 기존 사회의 틀은 지금의 웹이라는 매체에 빗대봐도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과거에는  '전기'가 만능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어떤 기술이 처음 등장할 때, 그 힘이 주목받는 방법 중 하나다. 그러면서 사제와 신도가 나뉘는 것처럼, 전기 마니아-기술자들이 전기 지식을 갖지 못한 자에 대해 미개인 취급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건 국가라는 틀에 담겨 있던 문화가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기술은 그런 틀의 강도를 높여주고 작동을 원활하게 해준다. 제국들이 세계를 개척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될 거다.

 

내가 왜 다수의 목소리를 소음으로 생각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소음과 음악과 언어의 차이는 뭘까? 이해할 수 없다면 물론 같다.

 

소리를 내는 기계의 목소리가 여성이 됐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미디어는 인간의 피조물이고 도구라는 의식 ; 기껏해야 비서, 집사, 하인, 하녀였다는 점.

 

현재의 녹음은 물리적인 변환을 거치지 않고, 다른 언어로도 가능해졌다. 또한 모든 소리의 치밀한 통제, 귀에 들릴 때 그것이 어느 정도의 강도와 위치에 있을지 예측이 가능하다. 소리의 디자인이 가능하다. 문자의 디자인이 가능한 것처럼. 어쩌면 디자인은 자본주의 최후의 놀이일지도. 모든 게 너무나 넘친다면, 남는 건 분배하고 정리해야 한다. 반면 마음 한켠에는 정말 그것이 전부? 라는 의문도 있다. 나 역시 언어가 포화상태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감정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감정만, 새로운 감정만. 그래서 언어의 깊이 따위 상관 없었던 거다. 그것도 이젠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이 손이 이렇게 떨리고 있는데, 제대로 나를 나누고 분배할 수 있을까. 결국 난 내 전부를 알아야만 늘어놓을 수 있을까. 아직 꺼내지 못한 자신이 남아있다는 건, 불행일까 행운일까? ...그렇다면 자본주의 세계는 어떨까?
이 책은 음악에 대해서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소리가 어떻게 송수신됐고, 어떤 반경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사용됐는지, 기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행동 기록을 통해 드러내고 있을 뿐.

 

최초 전기가 사용됐을 때의 센세이션.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부정적인 SF의 상상력이 기술 자체에 대한 부정성보다는 그것을 응용하는 권력에 더 초첨이 맞춰져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해서 인상적이었다. 전에는 다만 기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물론 그런 면은 반대로도 나타난다. 마치 현재의 웹을 정화해야하는 집안마당 쯤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 정책처럼, 기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소리의 네트워크가 국가적인 통제기술로만 자리했던 것은 아니다. 마니아들의 호기심 대상이기도 했고, 지역 자생적인 네트워크로 조직되기도 했다. 주파수가 겹친다는 혼선은 여기서 오류가 아닌 소통의 수단이 된다. 혼선을 통해서 사람들은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아직 녹음된 형태를 돌려가며 보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의 순간성이 남아있던 셈.
매질. 그리고 소리와 빛의 속도 차이가 그 감각의 속성에 영향을 줄까? 빛에 의해 재생되는 이미지와 빛으로 변환된 소리는 같은가? 물론 수신자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겠지만. (아마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공감각이라는 게 지나치게 시각 위주로만 인식되는 면에 대한 투정이었나보다;)

 

권력들 - 히틀러의 고양 - 루즈벨트의 냉정 - 일왕의 공백 - 한국의 코미디. 그 일그러진 권위. 스스로를 왜곡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권력 따위. 그러면 나는 어떨까? 난 스스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역시 조롱받고 있지 않나?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 세상을 반영한 나인가. 진짜 나는 기계의 목소리로 위장하고 있을지도.

 

책의 내용과 기존에 가졌던 생각이 뒤섞이고 있다. 책 읽을 때 지나치게 곡해에 의존하고 있다. 작가의 입장에 서려는 버릇이 남발되고 있다. 좀더 작가의 전체적 틀은 지켜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내 이야기를 쓰는 게 낫지. 다른 것에 나를 전염시켜서 어쩔 셈.

 

마지막으로, 소리와 웹의 차이점과 공통점들.
라디오나 전화 역시 기존 도구를 재매개하며 시작했어. 공연, 뉴스(신문의 구성), 음악, 전신. 그러나 라디오와 전화는 더욱 풍부한 가능성이 있었지. 바로 잡담. 라디오가 고유의 예술성을 구축하려 애쓸 때, 전화는 본격적인 미디어로 기능하려 한다. 무엇인가 중요한 도구에서 미디어가 되려면, 쓸모없는 짓거리가 가능해야 해. 가령 구글이랑 끝말잇기 놀이를 하는 거?
누군가는 그걸 여성이 참여하고 싶은, 사용하고 싶은 거라 말하더라. 그건 젠더로 남성이 도구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건데, 별로 맘에 들지는 않는 예시. 설령 진짜로 그렇다고 해도, 그게 차후에도 반복돼야 할 규범처럼 여겨지는 건 참 짜증이지. 완고한 가치는 비틀어 갖고 놀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최고라고 착각한다. 너그러움으로 세상 전부를 감당하고 자부하는 친절함. 그게 어린애의 순수함이라면 그나마 이뻐 보이는데, 늙은이가 그런 식으로 귀찮게 굴면 보기가 싫어지지.
전기나 소리를 다루는 기술이 신세계인것처럼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처럼, 웹 역시 그래. 그러나 웹은 국가보다 연구자와 기업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컴퓨터라는 단말기와 함께하면서 더욱 강력해졌고. 컴퓨터는 사실 애초에는 군사적 목적에서 적의 암호를 풀어내는 복호기로 시작됐다가, 모든 구조의 에뮬레이터로 재발견된 거지. 그건 인간의 대화 - 즉 언어기도 하고, 이미지가 될 수 있지. 그래서 맨처음 출판물의 형식을 빌어서 웹은 찌라시와 정보의 더미로 쓰이게 되지만. 이제 그 더미를 나누고 분류하고 기술이 중시된다. 작은 범위의 개인성과 연결성이 강조되고 있어.
여기에 아직 이 기술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은 지역과 문화적인 갭이 생기겠지만, 인터페이스의 발전을 그것조차 극복할 거다. 사용자의 동작을 예측하고 그에 대비하는 인터페이스는 결국 상대의 수준까지 예측해야 할테니까. 신체의 작동방식과 닮은 형태로 변화하는 디바이스는 컴퓨터와 웹을 인간에게 마치 기존의 신체처럼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지게 될 거다. 그게 이상이겠지만.

 

우리 신체의 본질(?)은 뭘까. 그래봐야 인터페이스는 계기판에 불과할 텐데. 그렇기에 누군가는 소리의 원본 - 소리가 발생한 장소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는 거겠지.

 

@7월 23일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