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일 일요일

소리의 자본주의 - 전화, 라디오, 축음기의 사회사 | 요시미 순야

천재는 개념에서 이미 질린다고 하지, 또 누군가는 '개념'만으로 예술이 가능하다 했지. 형태를 갖추기 전, 형식만으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난 천재도 아닌 것 같고, 영감이 샘 솟든 항상 차올라 있지도 않아. 오히려 무언가를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표현하지 않았던 착상은 버리지 못한 사랑의 미련처럼 나를 사로잡는다. 결국 우유부단만 증명할 뿐. 그런 방식의 소통은 만인이 같은 높이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최소한 서로를 연결한 링크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게 지치고 있다. 원래 기대하지 않았어, 아니 그래서 더 지루함이 가속해서 나를 앞지르는 걸까. 내 감정은 내 이성과 얼굴보다 빨리 나를 캐치해낸다. 그럴 때 내 얼굴은 난처함.
이 비겁자!

 

마법 같은 음성 언어. 시와 노래와 대화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로부터, 문자에 주문이 각인되고 복제하는 수단 자체에서 눈에 보이는 조형성이 추가되면서, 문자 언어 역시 음성 언어에 전혀 꿀리지 않는 예술적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인쇄술의 발명 이후, 소리가 복제되는 기술이 등장할 무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이야기다. 꽤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녹음 기술이 자본주의를 촉진시킬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가치 교환은 가치 보존을 전제로 한다. 자본의 장점이자 단점은 쉬운 복제. 화폐는 은행으로부터의 빚이라고 하지? 하지만 최초의 복제는 코드로부터 시작했다. 그건 규칙성을 가진 신호.  다만 그 형태가 소리였고, 그것이 오래 유지하게 되면 신체적인 소리처럼 긴 소리로 주고 받게 되었을 뿐. 그때 소리는 이미지가 된다. 기계적인 변환을 거쳐 진동으로 되살아나지. 그걸 소리의 죽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거기서 출발한다. 어째서 살아있는 소리가 채집돼야 하는가.

 

문자가 권위를 가질 때, 소리는 저항의 수단이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구호를 외친다. 모든 것이 이미지로 바뀌는 현재에는 오히려 침묵이 더 효과적이지만. 가령 촛불시위에서 보이는 건 빛과 신체이지 거기에는 소리가 없다.
있더라도 강조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모두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면 전혀 주목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어떤 소리가 인상적으로 들리는 경우는 대비 효과 때문이다. 아마 나는 웅성거리면서 자유를 느꼈던 세대와는 다를 거다. 침묵을 저항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방법일지도. 사실 그게 저항인지 알지도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과거에는 그랬다. 소문을 타고 권력은 흔들렸다. 그건 지금의 언론, 웹의 담화들, 술자리의 안주로 늘 반복되고 있지만... 거기에 권위가 있을까. 사실 그 보단 진실이 있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저 게임으로 보이니. 그건 아마 내가 저잣거리의 소통 자체를 혐오했기 때문일 거다.
이 책에서 보여줬던 소리로 연결된 여러 비전들과 그들이 기술적으로 나타났을 때 함께 밝혀진 기존 사회의 틀은 지금의 웹이라는 매체에 빗대봐도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과거에는  '전기'가 만능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어떤 기술이 처음 등장할 때, 그 힘이 주목받는 방법 중 하나다. 그러면서 사제와 신도가 나뉘는 것처럼, 전기 마니아-기술자들이 전기 지식을 갖지 못한 자에 대해 미개인 취급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건 국가라는 틀에 담겨 있던 문화가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기술은 그런 틀의 강도를 높여주고 작동을 원활하게 해준다. 제국들이 세계를 개척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될 거다.

 

내가 왜 다수의 목소리를 소음으로 생각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소음과 음악과 언어의 차이는 뭘까? 이해할 수 없다면 물론 같다.

 

소리를 내는 기계의 목소리가 여성이 됐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미디어는 인간의 피조물이고 도구라는 의식 ; 기껏해야 비서, 집사, 하인, 하녀였다는 점.

 

현재의 녹음은 물리적인 변환을 거치지 않고, 다른 언어로도 가능해졌다. 또한 모든 소리의 치밀한 통제, 귀에 들릴 때 그것이 어느 정도의 강도와 위치에 있을지 예측이 가능하다. 소리의 디자인이 가능하다. 문자의 디자인이 가능한 것처럼. 어쩌면 디자인은 자본주의 최후의 놀이일지도. 모든 게 너무나 넘친다면, 남는 건 분배하고 정리해야 한다. 반면 마음 한켠에는 정말 그것이 전부? 라는 의문도 있다. 나 역시 언어가 포화상태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감정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감정만, 새로운 감정만. 그래서 언어의 깊이 따위 상관 없었던 거다. 그것도 이젠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이 손이 이렇게 떨리고 있는데, 제대로 나를 나누고 분배할 수 있을까. 결국 난 내 전부를 알아야만 늘어놓을 수 있을까. 아직 꺼내지 못한 자신이 남아있다는 건, 불행일까 행운일까? ...그렇다면 자본주의 세계는 어떨까?
이 책은 음악에 대해서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소리가 어떻게 송수신됐고, 어떤 반경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사용됐는지, 기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행동 기록을 통해 드러내고 있을 뿐.

 

최초 전기가 사용됐을 때의 센세이션.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부정적인 SF의 상상력이 기술 자체에 대한 부정성보다는 그것을 응용하는 권력에 더 초첨이 맞춰져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해서 인상적이었다. 전에는 다만 기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물론 그런 면은 반대로도 나타난다. 마치 현재의 웹을 정화해야하는 집안마당 쯤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 정책처럼, 기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소리의 네트워크가 국가적인 통제기술로만 자리했던 것은 아니다. 마니아들의 호기심 대상이기도 했고, 지역 자생적인 네트워크로 조직되기도 했다. 주파수가 겹친다는 혼선은 여기서 오류가 아닌 소통의 수단이 된다. 혼선을 통해서 사람들은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아직 녹음된 형태를 돌려가며 보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의 순간성이 남아있던 셈.
매질. 그리고 소리와 빛의 속도 차이가 그 감각의 속성에 영향을 줄까? 빛에 의해 재생되는 이미지와 빛으로 변환된 소리는 같은가? 물론 수신자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겠지만. (아마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공감각이라는 게 지나치게 시각 위주로만 인식되는 면에 대한 투정이었나보다;)

 

권력들 - 히틀러의 고양 - 루즈벨트의 냉정 - 일왕의 공백 - 한국의 코미디. 그 일그러진 권위. 스스로를 왜곡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권력 따위. 그러면 나는 어떨까? 난 스스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역시 조롱받고 있지 않나?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 세상을 반영한 나인가. 진짜 나는 기계의 목소리로 위장하고 있을지도.

 

책의 내용과 기존에 가졌던 생각이 뒤섞이고 있다. 책 읽을 때 지나치게 곡해에 의존하고 있다. 작가의 입장에 서려는 버릇이 남발되고 있다. 좀더 작가의 전체적 틀은 지켜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내 이야기를 쓰는 게 낫지. 다른 것에 나를 전염시켜서 어쩔 셈.

 

마지막으로, 소리와 웹의 차이점과 공통점들.
라디오나 전화 역시 기존 도구를 재매개하며 시작했어. 공연, 뉴스(신문의 구성), 음악, 전신. 그러나 라디오와 전화는 더욱 풍부한 가능성이 있었지. 바로 잡담. 라디오가 고유의 예술성을 구축하려 애쓸 때, 전화는 본격적인 미디어로 기능하려 한다. 무엇인가 중요한 도구에서 미디어가 되려면, 쓸모없는 짓거리가 가능해야 해. 가령 구글이랑 끝말잇기 놀이를 하는 거?
누군가는 그걸 여성이 참여하고 싶은, 사용하고 싶은 거라 말하더라. 그건 젠더로 남성이 도구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건데, 별로 맘에 들지는 않는 예시. 설령 진짜로 그렇다고 해도, 그게 차후에도 반복돼야 할 규범처럼 여겨지는 건 참 짜증이지. 완고한 가치는 비틀어 갖고 놀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최고라고 착각한다. 너그러움으로 세상 전부를 감당하고 자부하는 친절함. 그게 어린애의 순수함이라면 그나마 이뻐 보이는데, 늙은이가 그런 식으로 귀찮게 굴면 보기가 싫어지지.
전기나 소리를 다루는 기술이 신세계인것처럼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처럼, 웹 역시 그래. 그러나 웹은 국가보다 연구자와 기업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컴퓨터라는 단말기와 함께하면서 더욱 강력해졌고. 컴퓨터는 사실 애초에는 군사적 목적에서 적의 암호를 풀어내는 복호기로 시작됐다가, 모든 구조의 에뮬레이터로 재발견된 거지. 그건 인간의 대화 - 즉 언어기도 하고, 이미지가 될 수 있지. 그래서 맨처음 출판물의 형식을 빌어서 웹은 찌라시와 정보의 더미로 쓰이게 되지만. 이제 그 더미를 나누고 분류하고 기술이 중시된다. 작은 범위의 개인성과 연결성이 강조되고 있어.
여기에 아직 이 기술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은 지역과 문화적인 갭이 생기겠지만, 인터페이스의 발전을 그것조차 극복할 거다. 사용자의 동작을 예측하고 그에 대비하는 인터페이스는 결국 상대의 수준까지 예측해야 할테니까. 신체의 작동방식과 닮은 형태로 변화하는 디바이스는 컴퓨터와 웹을 인간에게 마치 기존의 신체처럼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지게 될 거다. 그게 이상이겠지만.

 

우리 신체의 본질(?)은 뭘까. 그래봐야 인터페이스는 계기판에 불과할 텐데. 그렇기에 누군가는 소리의 원본 - 소리가 발생한 장소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는 거겠지.

 

@7월 23일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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