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일 월요일

형태의 탄생, 스기우라 고헤이, 안그라픽스, 2006

 

창조한다는 것. 시스템을 구축하고 원칙을 세우고, 모양에 힘을 불어넣는 일. 지금처럼 단어들을 엮어 흐름을 만드는 일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신, 국가, 사랑...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 앞에 모두는 평등하니까. 우리는 스스로의 가장 좋은 부분을(혹은 약한 부분을) 신에게 바친다.
안그라픽스의 책은 명성만큼이나 참 예쁘다. 그렇게 섬세하게 구석구석 신경 쓴 책을 보면, 난 응당 그에 걸맞는 섬세한 내용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책을 읽는 일에 있어서도 더 집중력을 쏫아 붓게 된다. 더 이상 메시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독되지 않는 의미들은 도처에 넘친다. 스스로를 알아달라고 유혹하는 사인들.
무엇을 택해야 할까? 난... 스스로를 공백으로 만들면 그들이 쏭아져 들어올 거라 기대했었다. 맞다. 내 호기심은 여전히 왕성하다. 스스로를 잃어버릴 만큼. 그렇게 계속해서 다른 가치들을 올려놓을 테이블이 되고 싶었다. 어떠한 선입견 없이.

 

그러나 한 사람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가치관'을 확립하는 게 아닐까. 국가가 시민에게 기대하는 것, 종교가 신도에게 기대하는 것, 연인이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
그들이 나에게 바라는 모습들,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 역시 일원적인 순수성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인지도.
세계라는 거울이 나를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순진함.
나르키소스 최후의 유혹.

 

그에 대처하려고 난 변덕을 추가시켰다. 단순히 지루해서 그랬던 건 아니야. 책임지기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고. 더 갖고 싶어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지. 내 변덕은 언제나 버릴 때만 발휘된다. 빈 자리가 채워질 거라는 기대를 무의식적으로라도 하고 있을까?
그들 믿음의 미약함을 몸소 실천해 보였을 뿐이다. 완전한 파괴 대신에 변덕으로 위안을 얻었을 뿐. 허무에 대한 의지는 나에게 분명 있지만, 그것이 지켜지려면, 그 공백이 공백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정말 번잡한 배리어가 필요하다.
이 책을 보며 난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단순히 문화적인 친근함 같은 '의미'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투명성'과 '반성성'이 공존하고 있는 현재 예술이나 웹의 흐름은, 종교나 정치와 같은 현실적인 시스템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로서 완전하지만 현실과 분리된 어떤 것. 그렇게 이분법적인 사고 패턴은 동서양 모두 있다. 다만 서양이 현실이라는 그림자 저편의 이상향으로 그곳을 완전히 분리시켰다면, 동양의 이 책의 카타치나 한국의 이기론, 중국의 음양처럼 현실에 상징 체계가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다신교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국민은 위계질서는 있지만 누구나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이 되어야 하나. 신화 속 신들은 자신들의 신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각자 책임지는 가치들이 있지. 그 정도로 책임져야 하는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거니와 신도를 만들어야 하는 귀찮은 짓거리를 해야하다니. 그런데... 이런 내 의지는 무슨 가치를 책임지는 걸까? 뭐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단순히 부정할 따름? 내 의지는 기존 가치들의 파괴 이상의 것은 해낼 수 없는 걸까.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난 생각했었다. 나 역시 내 행위와 의미를, 현실과 현실 너머의 것으로 분리시키고 있었어. 좋지 않아. 스스로를 실험체로 쓰는 거야 그렇다 쳐도, 그 일을 희생 제물 바치는 거랑 동격으로 여기는 거. 나 역시 종교에 매혹되었던 트라우마가 있고, 몇 년 간 정말 마음이 아팠을 땐 수도사나 될까, 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해도. 단순히 종교의 오라를 문화적 색채로 즐겨 보려는 건 나에게 위험한 방법이었다. 나 역시 잘 통제된 제국. 멋진 영웅의 의지가 발현되는 체계를 내심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내 기억에서 '왕'이라는 개념은 동양적인 거다. 여기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내 손에 닿지 않는 이상에 대한 충성이 신앙이 현실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그게 더 재밌어. 역사는 그러면서 만들어진다. 인간의 현실과 분리된 이상적 가치는 그걸 탓할 존재로 악을 만든다. 그 분리 행위 자체가 현실로부터 개입을 차단하는 수단일텐데. 네트워크의 주인은 권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권력이 조정해야 한다. 분리가 악의 소행이니까, 연결은 선한 것인가? 그런 믿음의 코드들은 종교나 예술이나 정치 모두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기존 세계를 완전히 부정해야 했던 시도들은, 결국 이 세계와 반대되는 일원적인 이상향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꼭 유일한 대안이고, 그들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대상이어야 했을까.
좀 더 작은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해. 단순히 서로를 지켜보는 걸로는 불충분해. 타인이나 규범들에 의지하게 되면, 그저 가만히 귀엽받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만일 그들의 기준이 변하게 되면?

 

난 그들에게 내 기준을 가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건 내 원동력이 될 수 없다. 내가 구현하려는 레이어는... 외양에 있어서는 전체와 부분이 서로 이어지고 순환되는 패턴이 될 거야.
아마 내가 부분에서 막힐 때 전체 틀에서 답을 얻고, 틀에서 막힐 때 세부 규칙에서 돌파구를 얻기 때문이겠지. 거기에 의미는 중요하지 않아. 그를 트리로 나타낼 수 있다면, 의미의 일관성은 없을 거야. 그게 내가 스스로에게 갖는 낯섦의 이유겠지.
이 책은 그런 패턴마저 얼마나 일관적일 수 있는지 보여줬어. 그건 역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그렇겠지? 좋은 관찰자(저자)를 만난 탓이기도 하겠지만, 프로세서의 의지도 강했을 거야. 난 의미 없이 해내고 싶고, 그러니까 지각에 상징을 담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즉 메시지와 형식은 분리 가능하다는 거야. 나도 상징은 즐겨 쓰지만, 좋아하지는 않아. 이제 내 상징은 기존 상징을 뒤트는 정도로밖에, 그런 저항은 기존 설정이 필요해. 그것만이 재밋거리라고 할 수 있는데, 난 왜 지겹지? 자기 부정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서?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젊어질 수 없어서 그래. 청춘을 에뮬레이트할 수 있어. 그런데, 신체를 에뮬레이트할 수 있을까? 그 간극을 즐길 수 있는 사람,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싫어졌어. 인간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의 짓거리와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되는 거야.

 

아직 난 베이컨이나 실레의 이미지가 좋아. 그러나 그들의 그림은, 징후나 결과일 뿐이지, 나에게는 과정이 될 수 없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그걸 극복해야 해. 워홀 같은 방법 말고. 뒤틀기 지겨워.
좀 더 비인간적인 방법을... 그러나 분명 인간이 갖고 있는 기질을. 또 그걸 유희라고 단정짓긴 어려워. 시작은 될 수 있겠지만.
끝을 내지는 못해. 그렇다고 비극 같은 파국은 제외한다.

 

그 끝이라는 건 내 생명을 말하는 거야. 그 이상의 증명은 불필요하다. 나 역시 가치를 재단하면서, 좋은 것을 선택하면서 시작했지. 하나에 충실할 수 있었던 건 옛날 얘기야. 이제 인간은 그렇게 곱게 자기 인생의 끝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참 고대의 이상이지. 그는 절대적인 속박을 깨면 각자에 맞는 가치를 스스로 택할 수 있고, 그런 가치의 화신으로 개인 대 개인의 마찰과 교환을 거쳐 점진적으로 인류가 풍성해 질거라 믿었겠지만, 이제는 현실의 속박이라는 것도 의미를 상실했고 개인이라는 단위도 무의미해졌어.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워 보이는 가치를 돌려가며 사용할 뿐. 그 무수한 링크가 다양성의 바탕이 될까? 누구의 다양함일까? 국가? 세대? 문화? 인간은 그저 밈을 위한 단말기야?

 

개인이라는 지루하면서도 낯선 단위. 더 이상 새로움이 불가능할 때 오히려 결핍과 미개함이 부각된다. 집단과 개인은 그렇게 엮임을 지속하면서, 그런 무리들은 다른 무리들과 격차로 구별되면서 나열되겠지. 보다 많은 가치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단위로서, 그리고 그와 같은 단위들과의 많은 링크를 소유한 개인들의 무리. 나도 거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어. 그런 레이어가 없으면 신체가 존재할 수 없어. 최소화를 바라기는 하지만...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너무 순진했어. 자기만의 환상에 너무 의지했어. 종교 같은 게 될 수 없는 환상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시야를 방해할 뿐인데.

 

내가 좋아했던 걸 스스로 부수는 이유는, 그게 나에겐 신체나 다름 없기 때문이지. 사람은 참 사소한 걸로 죽어버리기도 하지만, 재생도 쉽거든. 너무 반복되면 왜곡되니 문제지만.
아마 이 글은 이 책에 의해 스스로가 부서진 다음에 재배열되는 과정을 쓰려고 한 것 같아. 그러나 내가 하려는 방식에 이름을 붙이지는 못했어.
형태를 탄생시킬 정도의 믿음은 없는 거지. 그렇다고 안 믿는 걸 믿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감각은 낭비를 좋아할까? 그저 감각에만 솔직하고 싶은데... 왜 늘 정리되지 않는 기분이 들까? 감각에는 주체가 없기에? 욕망만이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솔직함을 빌미로 욕망에만 충실한 것 따위 제일 저질이라 생각하는데. 

 

@08.01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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