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일 일요일

문학소녀 시리즈, 노무라 미즈키, 학산문화사

 

문학소녀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세헤라자드 페티시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나 역시 문학인간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 민감하게 반응할 거다. 자신이 허무하다는 걸 인식한 다음에는 리터러시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아무나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순진하든, 계산적이든 어떤 의미로든 말이지.

 

하지만 리터러시에는 함정이 있다. 리터러시가 삶과 유리될 때, 그것은 키치가 된다. 손쉽게 변용 가능하면서도, 누구에게나 어울리고,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하는 좋은 것. 거기에서 눈을 돌려 특별함을 찾는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옷을 잘 입는 거랑 패셔너블한 게 같을까? 누군가에게는 적합해도 누군가에겐 과잉된 거다. 문학은 언어의 패션이다. 어조, 타이프, 문체, 진실성 뭘로 보든.

 

아마 그 대비 - 어떤 기준에 따라 나열될 수 있는 각자의 진실, 그 단계들의 경게선의 음영과 경계선에서 멀리 떨어진 각 단계의 중심부는 밝게 보이는 - 착시처럼.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할 시점이지만, 그것은 생략. 그 일은 조서를 쓰는 일만큼이나 번거롭다.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용서받거나 하고싶지 않으니 상관없어.

 

다만... 이제는 글쓰기가 다른 의미로 두렵다는 걸 말해야겠다. 전에는 쓰고나면 잊혀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쓰고나면 진실이 된다. 잊어야할 것들과 다짐해야할 것을 잘 구별 못 하겠어. 음각과 양각의 차이일까?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결국은 감정의 문제일까? 내가 음악으로 감정을 보충하듯, 과거에 나는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존재시켰지. 그건 아바타나 철학적인 근거로 삼는 식은 아니야. 세헤라자드의 말을 듣는 입장에 가까웠고, 점점 정말 존재 그 자체, 나라면 쓸 것 같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대신 써준 것만 같은 느낌에 중독됐지. 점점 팬으로서는 불성실해졌지만.

 

내가 그런 독자였기에, 작가로서 나 역시 독자를 믿지 않아. 아직 음악은 내 양식이지만, 책은 점점 먹을 게 적어져. 아마 쓰게 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거 같아서.

 

이 시리즈의 방식으로 쓰지는 못하겠지. 이 작가의 마음을 모르겠으니까. 작중인물에는 크게 공감해. 토오코x이노우에 커플의 모습은 각기 내 반 정도를 나눠놓은 모습이라서 개인적으로는 더 눈물이 났지. 고전적 스토리의 패러디와 학원 미스터리와 동인 코드가 어우러져 있고, 텍스트의 플롯이나 볼륨은 물론 일러도 깔끔했지. 에필로그는 불필요했다고 생각하지만.

 

끝나버렸다는 게 내 심정이지. 작중인물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들켜버린 거야. 그럼 더는 그렇게 못하지. 그게 내 패턴인가봐. 확인되는 순간, 멈춰버리는. 개념주의를 긍정하면서도 그걸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확실히 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어. 그게 오히려 부정적인 면이 강조돼 버리니... 아슬아슬함을 즐긴다고 해야할까. 극복이 가능할 지는 모르겠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삶은 누구에게나 흘러가. 다만 너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다르니까 하는 말이야. 평범, 특별의 범주와 별개야. 네 스스로를 구속하는 가치들과는 무관해. 그래도 즐겁다면, 그게 진짜지. 그런 가지치기에 네가 관심이 없다면 상관없겠지만. 하지만 나 역시 별로 나무들을 사랑하지는 않는데...

 

만일 상징성이 강력하다면, 그것은 과거의 효용성을 차치하고서도 현재 시점에서도 바로 인식 가능해야 한다. 물론 그걸 본능이라던가 황금비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 보이지 않게 그 코드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가, 그런 문제. 그리고 그들을 담아내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게 과연 쓸모가 있을지 그런 문제.

 

@7월 25일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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