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0일 일요일

베레니체의 미투데이 - 2009년 9월 20일

  • Color Filter - Sleep In A Synchrotron(me2music [수입] Sleep In A Synchrotron Color Filter music video youtube PPT;)2009-09-15 00:17:28
    [수입] Sleep In A Synchrotron
    [수입] Sleep In A Synchrotron
  • The xx - Basic Space / Crystalised : ㅋㅋ 귀엽다.(The xx | music video | Basic Space | Crystalised | 스크랩 | site)2009-09-16 01:10:36
  • 가장 고전적인 것과 참신한 걸 함께 배웠어야 했는데‥ 역사적인 거 말고(me2mobile 교육;;)2009-09-16 17:24:12
  • 다음 SNS 같은 건 이미지로 교감하는 형태가 될까? 그 전에 즉각 반응할 기기가 필요하겠지만, 각자 뿌려놓은 말들을 책 정도의 레벨로 정리할만한 능력이 당연하게 되고, 개방성만큼 폐쇄성도 인정받아야겠지만, 그때까지 자아의 가치가 남아있다면 말이다.(diary | sns)2009-09-18 00:42:45
  • donawhale - 반딧불소년(me2music 도나웨일(Donawhale) - Dive to Blue | YouTube | music | live | 스크랩)2009-09-18 00:55:07
    도나웨일(Donawhale) - Dive to Blue
    도나웨일(Donawhale)  - Dive to Blue
  • L'Arc~En~Ciel - Niji(me2music L`Arc~en~Ciel - 虹 (Niji / 무지개) - Single | music | live | youtube)2009-09-18 02:43:19
    L`Arc~en~Ciel - 虹 (Niji / 무지개) - Single
    L`Arc~en~Ciel - 虹 (Niji / 무지개) - Single
  • Organ Mix : 재밌었다. 한적할 때 다시 가봐야지.(Organ Mix | 토탈미술관 | diary)2009-09-18 22:42:44
  • RE : 음… 옷 못 입는 사람? 몸과 마음 모두. 또… 기생하는 타입? 역시 마찬가지로. 글쎄, 요즘은 싫어한다는 걸 실감할 정도로 신경이 별로. 아… 거짓말을 잘 한다고 스스로 말하거나, 거짓말을 아예 못 한다고 말하는 식의, 그런 뻔한 답답함도 별로.(diary 취향;)2009-09-20 00:51:15
  • Aphex in Wonderland, pt. 1(Aphex twin | alice in wonderland | music video | animation | vimeo | Chosen Lords | Fenix Funk 5 | Nick Meador | 스크랩)2009-09-20 03:19:49
  • Toxicity by System of a Down(YouTube | cover | music | live | Toxicity | System of a Down | ??;;)2009-09-20 15:21:50

이 글은 베레니체님의 2009년 9월 15일에서 2009년 9월 20일까지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9월 15일 화요일

소립자, 미셸 우에벡, 열린책들, 1998

 

오랜만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었다. 힘들더라.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 사람 글은 시점이 깨져있는데다가 그것 역시 별로 인간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인간적인 글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다만 이 사람과는 입장이 다르다는 걸 내내 느꼈을 뿐이다. 또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로만 보지 말아달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사실 말미에 보니 그럴만한 근거는 갖고 있었지만 다른 작품은 보지 않아서 이 사람의 문체라고는 확신할 수 없겠다. 물론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사소한 거라면, 외양의 묘사 대신에 문화적인 코드나 상품 카달로그에 붙은 가격으로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 같은 것? 가계도라거나 물질성과 같은 기존 세계의 개념으로 이야기를 형성해나가지만, 어느 순간 참았던 작가적인 본심이 터져버린다는 것? 그게 나쁜 타이밍은 아니라서 재밌게, 라기 보다는 흥미롭게 보았을 테지만, 하지만 그 조차도 의도된 약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별로 이 사람의 진심은 알기 어려운 글이었다. 어느 비평가가 이 소설에 비하면 다른 소설들은 유치하다는 뉘앙스의 문구를 책 표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 말대로 시점의 거리가 꽤 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폴 오스터 이후의 감수성으로 현실을 푸코식으로 재해석하여 대체 미래를 그린 이야기로 느껴졌지만, 아마 읽는 사람마다 각자의 세계관에서 이야기 속으로 진입할만한 입구는 많이 열어놓은 장점은 있을 거다.

 

다만 그게 그 비평가 말대로 거대함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라는 쪽에 가깝다. 확실히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68 이후의 세대의 -  나는 누벨바그 영화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꽤나 좋아하던 그 세계의 후예의 - 성장이고, 그들이 거쳐나간 과정을 폴 오스터의 문팰리스가 미의식만으로 극복해버린 현실이라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할 때 그걸 개인적 차원이 아닌 누구에게나 대입 가능한 공식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로 보여줬지만, 공감은 되지만 인정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이 이야기가 허접하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는 별 필요 없다는 말이다. 내가 이걸 토대 삼아서 새로운 글을 쓰려고 하는 건 아닐 테니까. 나 역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아름다운 의지에 속하고 싶었고. 쾌락이 천박하게 소모되는 걸 혐오하면서도, 그 감각이 단순히 스타일만으로도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욕망에 솔직해야 할 것을 말하면서도, 스스로의 욕망을 죽이려 애썼기도 하고. 그러나 니체나 보들레르나 사드에서 출발한 작가를 만나서 반갑기도 했고, 또 작가의 시점을 구현하는 체계라면 약간 반하기도 했다. 내가 소설을 못 써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꿈이라던가 사회이론 들먹이는 건 지겨웠지만, 그런 거슬림을 감싸는 작가의 시선은 참 어지럽게 자연스러웠다. 수식적인 아름다움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보다는 은밀한 의지가 살아있다고 느꼈다. 두 인물이 각기 두 손전등이라면, 그걸 가지고 밤길을 헤매는 누군가의 앞에서 안전하게 걷고 있는 느낌 ; 그런 지배받고 싶은 마음을 자극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여기서 나는 이 글이 그런 지배 상태에서 독자를 쫒아내려는 의도로 작중 인물을 파괴시키면서 작가가 부각한 가치를 독자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드는 글쓰기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음... 그건 내가 읽은 다음에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기억이 났을 뿐이고, 실제로 이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냥 술술 읽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 세계는 시마다 마사히코가 자기파멸적으로 부정한 세계였지만, 여기 인물들은 그럭저럭 사회 속에 숨어들어 잘 살아가더라. 현실로 말한다면 나 역시 이쪽이지만, 이상이라면 역시 저쪽이다. 그게 나에겐 거슬렸을 거다. 이 정도까지 구차하게 해야돼, 그런 느낌? 삶에서 내가 욕망을 완수하기 보다는 양식을 구현하는 쪽에 지금은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섹스가 욕망을 대변할 수 있다는 걸 난 더 이상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작가의 입장이라면 난 욕망은 섹스를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아라는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을 약으로 제거한 다음에야 행복해하는 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반대는 종교적인 세계가 될 거다. 죽음까지 능가하려는 욕망은 이 책에서 실현된다. 물론 그건 우리에게 익숙한 정신적인 종교는 아니지만... 과학적인 토대에서 출발하여 천국까지 실현한 종교라고 할까? 그걸 작가가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난 더 코어한 쪽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련다. 이 이야기에서 그게 단백질의 분자구조였다면 나에겐 감각, 그러니까 전기자극이다. 몸 전체가 크로이체 소자로 뒤덮인 인간이라... 그러면 더 민감해질까? 단순히 정보의 양이나 자극만으로 쾌락이 결정된다면, 현재의 이미지는 단지 그게 그 기제들을 권력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라 그럴까? 난 받아들이는 입장이 더 먼저고, 그건 단순히 소화기관처럼 정렬하면 충분한 게 아니라,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 감각을 재현할 코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이야기의 체계를 맘에 들어한 이유는, 그게 현실에 있어서 실천 가능하기 때문일 거다. 하긴 벌써 2009년이 끝나간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새로운 사상이 이미 나왔어야 하나? 그런 식으로 현실이 진행될까? 우리에겐 더는 도플갱어에 대한 공포가 없을까. 개인이나 자유를 중시하는 것은 그저 자본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런 권력의 작동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아닐 것 같다. ...어쨌든. 나에게 이 책의 미래를 긍정한다면, 그건 호기심이다. 나에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감정. 사물에 호의를 갖지 않은 채로도 기다릴 수 있는 그 감정을, 나는 동일성이나 잘 작동하는 양식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특정한 규칙이 필요할까. 그러자면, 그걸 말하려면 긴 이야기가 필요할 거다. 지금에 있어서는 이 사람만큼이나 실천 가능한 어떤 양식과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다르다는 것만 확신한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9월 13일 일요일

베레니체의 미투데이 - 2009년 9월 14일

이 글은 베레니체님의 2009년 9월 7일에서 2009년 9월 14일까지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9월 10일 목요일

눈과 마음, 메를로 퐁티, 마음산책, 2008

니체 이후로 빠가 될 사람은 없었는데, 이 사람이라면 그렇게 될지도... 제대로 이해해서 공감해서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문체의 울림이 좋다. 다만 니체는 원래 당김음을 잘 쓰고 번역을 해서 근육은 좀 망가지더라도 뼈대는 워낙 단단하니 우려내는 맛이라도 있었는데, 이 사람 글은 번역하다 자기 꼬리를 무는 문장이 돼버리는 프랑스에다 원래 스타일도 여백으로 환기되는 식이라, 에센스만 뽑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결정론적 시각이 현실과 동떨어질 경우의 위험성에 대해 그는 염려한다. 또한 데카르트의 접근법 자체가 지나치게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켰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실 그런 분리 자체가 이미 나에겐 잘못된 언어로 보이지만, 메를로-퐁티는 지금 내게 마조히스트로 남아있으며, 사실 현상학이라는 이론 자체가 선언상으로는 철이 지나고 한창 기술적으로 실현되는 단계라고 생각하니까, 별 상관 없겠다. 다만, 그래도 아직 이 책이 유효하다면 기존 세계를 이루던 관념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고전이 되고 진보의 한 단계로 인정되는 현실에서 적의 문법대로 복수할 수 있는 카미가제 역할로는 재밌겠다고 본다.

혹은 시지각을 종교적인 경지까지 승화시킬 정도로 그에 대한 사유를 진행하면서, 시지각 자체의 한계를 폭발적으로 드러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 내가 그에 대해 읽은 건 이 책과 다른 소논문이 추가될 뿐이니, 아직은 기대감일 뿐이다. 또한 실행자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이 책도 그렇고 곰브리치 경의 미술사를 보면서도 그랬는데, 동서양의 차이가 확실히 있다는 걸 느꼈다. 나 역시 메를로-퐁티의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심지어 동일할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기 보다는 그걸 내가 바란다고 해야)하지만, 주체가 객체를 보면서 선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경계들이 무화되지 않을까. 어쩌면 그게 예전에 본 스기우라 고헤이의 형태의 탄생에서 말한 카타에 치가 깃드는 방식인데, 물론 메를로-퐁티 역시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방식이 주가 되어 있고, 나 역시 그들의 책을 토대로 말할 뿐이지만, 경험적으로는 다르다는 거다. 나와 사물들 각각의 거리도 시점에 따라 일정하지 않지만, 일대일 관계만 보더라도 나와 사물의 경계와 사물과 나의 경계는 일치하지 않는다. 서로의 교집합이 내 눈에 빛을 통하여 드러날 때, 그 경계는 스푸마토 같은 걸로 바꿔 말할 수 있는 그런 가장자리의 선일까. 아마 내가 선에 대해서 정리하지 못한 부분일 거다. 혹은 아예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왜냐면 이 사람 글쓰기 스타일이 자신의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조히스트라 그런 강력함을 만나면 좋긴 한데, 차라리 츤데레면 받아줄만 한데 이 사람은 백치미 같다.같은 레벨의 고민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예 이 사람의 사유에 절대적으로 동의해야만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묶여야 저항이라도 하지 그런 느낌? 책이 자그마해서 필사해도 좋을 정도인데, PDF로 만들어 놓으려다 시간이 없어서 다는 못했다. 좀 신변이 정리되면 하루 날잡아서 해야겠다.

요즘 무의식적으로 특정 감각의 막장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있나보다.

2009년 9월 5일 토요일

베레니체의 미투데이 - 2009년 9월 6일

  • 하긴, 글꼴도 고딕이 좋지.(고딕 goth font diary)2009-08-22 23:16:15
  • 이제 나가볼까 ㅠ(tacit perform diary)2009-08-23 13:38:11
  • Annika Bäckström(스크랩 bloglovin)2009-08-23 14:12:05
  • 슬슬 나올 법 한데, 아직 한국 음악에 대해 정리한 책은 없구나. 포크 같은 특정 감수성에 얽매이거나 잘 만들거나 잘 팔린 거 치중하지 않아도. 그냥 음악사적으로 맞아 떨어진다거나 형식만으로 나눠보는 시도도 먹힐만큼, '한국적'이지 않더라도 작업들은 다양할 텐데.(me2book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 1 박준흠;;)2009-08-25 22:12:59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 1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 1
  • 바그너와 블루스 / 일렉과 펑크 ; 사이인데 어디인지 모르겠다;;(취향 diary)2009-08-27 00:18:12
  • 그늘이 추워졌다!(me2mobile 날씨 >_<)2009-08-31 09:11:11
  • 아킬레스가 만일 시공간을 생각한다면, 그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me2mobile 발레리 quote)2009-08-31 13:21:29
  • 누군가의 이윤은 누군가의 거스름돈 ; 거스름이라는 말도 참 재밌다.(me2mobile diary)2009-09-01 19:55:18
  • 하루하루 마음먹은 양식이 구현되는 축복, 매일매일 예기치 않은 자극에 감사, 나머지 출몰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에 대해 기다릴 수 있도록 기도를 ; 나에게.(diary)2009-09-06 00:42:48
  • 헤어스타일은 어떤 사람 철학을 드러내기 가장 괜찮은 방법 : 몸에서 가깝고, 인상을 좌우하고, 조금씩 자라고, 끝이 훼손되고, 관리 안 하면 망가지고, 염이나 변형도 가능하지만 뿌리는 같다. 그래서 난, 헤어스타일과 스타킹 매치를 잘 하는 사람에 끌린다.(... 취향;)2009-09-06 00:51:47
  • 담배 한 개피에 물 250㎖, 소금 작은술엔 그 두 배는 필요한 것 같다 ; 해독하려면.(소금 물 담배)2009-09-06 02:00:22

이 글은 베레니체님의 2009년 8월 22일에서 2009년 9월 6일까지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2009년 9월 3일 목요일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예경, 1995

대학 말미 타과 수업으로 들었다가 졸업을 못 할뻔 하게 했던 문제의 과목에 교재로 쓰였던 책, 이번에 시골 내려가시 다시 보니 참 재밌다. 교재로 쓰지 않았다면 더 재밌게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교재로 쓰기 전에 한 번쯤은 훑어 본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때는 취향이란 문제에 참 민감해서, 나랑 같은 타입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던 때였다. 저자처럼 너그러운 맘을 가지고 작업자나 시기에 따라 당위성을 배려하는 일 따위 없었다. 어쨌든 도판으로 보니 원작의 스케일이나 텍스처는 별로 실감나진 않지만, 그래도 그들 행위의 의도만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평이란 행위에 대한 입장도 그렇고. (원본을 보고 싶어하게 하는 리뷰로서 최상이기도;)

 

나에게 인상적으로 보이는 흐름은 아는 대로, 보이는 대로, 느낀 대로 그린 사람들의 엉킴이다. 내 취향대로라면 그것들을 투명성과 반성성이라거나, 계산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나눌 수도 있을 거다. 아마 그 사이에 있는 자연은 그 이분법이 모두 막혀버릴 때 새로운 길이 되겠지. 이념이 갑갑할 때, 자연은 해방구가 된다. 반면 감수성으로 혼란스러울 때 자연은 올바른 규범이 된다. 자연을 모델로 삼아야할지, 극복해야할 무엇인가로 여길지... 그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처럼 무심할 수도 있겠고. 최소한 그걸 통해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끝없는 탐구심을 저자는 참 좋아한다. 동시에 그 작업들이 삶의 결을 드러낼 때 감동받는 걸 보며 참 순수한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확고한 애정이란 지각의 균형이 잡혔을 때 발현된다.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준들은 기실 개인에게는 복합적으로 잠재해 있고, 지나간 작업들을 묶어 정리할 수 있고 그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해도 특정 유파의 수확에는 얻는 부분이 있으면 잃는 부분이 있다는 말처럼, 나 역시 문화에 있어서 진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는 현재라는 폭풍이 지나갔을 때 고요한 중심과 부서진 거리의 잔해들로 그 힘을 가늠할 뿐이다. 

 

창작자의 흐름, 창작이라는 행위의 원동력, 그들이 세계를 응시한 방법, 고대로부터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 그것들이 이론이 되고 학문이 되는 과정,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미술가들의 역사라기 보다는 비평의 역사로 더 실감이 난다. 예술이 권력에 기생하며 권력자의 아량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체계라고 생각하면, 이 책의 매력인 너그러움에 대한 삿된 생각일까. 그저 세대차이일지도 모른다. 가령 이 책은 뒤샹 이후의 작업들과 미디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아마 이 책에 담긴 시각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을 통한 예술이기에 그럴 거다. 나도 그 효과를 도매금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기계적인 입장을 이식한다고 그게 꼭 확장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역시 취향 문제겠다. 혹은 자기연민에 가까울 지도.

 

모든 인간이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모든 집단이 각자의 잣대를 주장해도, 여전히 불충분함과 과잉은 남는다. 또한 도구가 사용자의 사고를 결정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예술은 유효하다. 아직 탐구하고 거부하고 정리할 것이 남아 있으니까. 예술가들이 어떻게 기존 세계에 자리를 잡고, 그들 작업이 기존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 일은 부차적이다. 최소한 그들 사후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그렇다. 나는 권력과 종교의 우상이었던 예술을 안다. 또한 지금 창궐하는 우상도 안다. 그러나 나 역시 메타 예술 속에 있으니... 돌아갈 자연이 없으니 배수진 같은 위기감이랄까. 물론 이런 자신을 설명하는 일 역시 부차적일 테지만.

 

현재에 대해서, 교환이 끝나면 잊어버릴 가치에 있어서 퇴로는 강박적인 신념이나 의지 외에는 없는 걸까? 과거에 대해서,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고 재배치하려는 힘은 결국 다른 역사로 반복될 수순인 걸까? 미래에 대해서, 반보 앞서 나가야 한다는 말처럼 그렇게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식이 적합한 걸까? 더는 새로움이 의미가 없다면 과거로부터 선별한 가치들을 흘려보낼 수도 있겠다. 내 글쓰기는 불가능. 나는 학교에서 과거의 기예를 배우지 않았다. 애초에 글을 그림처럼 여겼다고 하면 게임 셋 같은 느낌인데, 그렇다고 그림을 글처럼 여기지는 못할 것 같다. 오히려 반대다. 시는 나에게 거침없이 접근하지만 조심스럽게 표현되겠지만, 그림은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만 거침없이 표현될 거다. 기본자세는 그렇게 잡는 게 좋겠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090821, Tacit perf@Doosan A.C.

틀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데... 선언 이후, 모자란 부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게 더 어렵다. 그 지속만으로도 설득력을 지니기도 하고. 이들이 사용한 되돌리기가 가능한 형태와 소리. 그건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순환하는 게 아니라, 작은 프레임 안에서는 유효한 플로우. 형태가 의미를 얻지 못할 때는 리듬만이 남게 된다. (내가 그때 생각했던 의미는, 재사용 가능한 일관성이 아닐 거다)

음의 질감, 음의 어조 : 같은 리듬을 다른 음조로 말해서 중층 효과를 얻는다. 그 겹침은 전체 구조의 앙상함을 감추고 흐름을 형성한다.
프레임이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불완전한 형태는 양의 차이로 이해된다. 반이나 남은 물, 잊혀지지 않는 후렴구 같은 거.

형태가 존재할 경우 그 안에서 유희가 가능하지. 일단, 나는 선형만을 형태를 이루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선형적인 흐름이 형태를 이루는데(형태라고 인식되는) 주된 방식이라고 여긴다. 애초에 프로그래밍이었으니, 비선형일리는 없지. 내부 언어의 문제, Ctrl+Z이 가능하다는 거다. 다만,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감각과 논리를 일치시키려는 욕망은, 기존에 완성된 양식(작품)을 파편화하고 그걸 재현하면서 충족될까? 완성이라는 말이 양과 질을 합친 수준으로 이해된다면, 가능하겠지. 오늘 공연의 포장은 사운드 아트라지만, 실제로는 Aka 총체예술, 이었다. 창작자에게는 그러하다고 한다, 감상자 입장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Tacet(Ita) : Tacit (Eng) = 침묵. 그렇다고 한다. 존케이지가 떠오른다. 실제로 구현된 건 사념의 리듬이랄까, 게임음악처럼 사용자의 조작이 그대로 소리로 나타나는 식이었지만. 코리 아크엔젤이었나? 마리오 갖고 장난치던 사람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 보단 8비트 게임음악이... 가장 개념적(?) 아이디어로 승부했던 게임들. 그에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단순한 음악들. 그런 음의 좌표화는 음의 건축화로 이어지겠지만, 사람들에게 그게 필요할 이유가 있을까. 소리가 사람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는 건, 글이나 이미지에 비하면 더 원초적이라 오히려 무감각해졌다. 귀를 막고 사는 사람은 의외로 많을 것 같은데. 비명이나 외침이 충격을 주는 일은 글이나 이미지가 무력해질때나 가능하다. 다만 이걸 이미지에 대항하는 언어와 소리의 동맹으로 생각하면 재밌겠지만.

어쨌든 난 프로그램 위주라고 생각했다. 음악의 확장? 악기의 확장 정도? 그런데 그 보다는 표현 수단으로서 음악을 주로 사용한다는 정도지, 그러니까 컴퓨터라는 프로세서를 이용하면서 소리나 이미지를 모사 가능한 양식을 구현한다는 시도로 느껴졌다. Data로 출발하면, 다른 표현 수단을 전부 합성할 수 있다. 다만, 그게 인간 감수성이나 사고 체계의 전환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그러니까 계산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지...

좀 더 출발점에 집중해서, 착상의 차원이라면, 자연에서 얻는 영감이나 코딩 라인을 보며 얻는 영감이나 같다고 생각한다. 기술미학연구회 분의 질문이 그랬는데... 그게 과연 창조일까, 라는 의문. 그러나 나는 자연이든 인위든 이해한다는 믿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 자바스크립트 언어를 모르면 그건 자연이다(...). 답변은 그저 대등하다고만 말했는데, 그런 다분히 낭만적인 출발에서 왜 분업화된 시스템이 강조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Tacit 경우는 전체를 아우르고 싶어해서 기계어에서 감성을 찾고 있다고 느껴졌는데. (그게 원맨밴드를 말하는 건지, 누가 끼어들어도 좋을 양식인지는... 아직 거기까지 선택할 때는 아니고)

즉흥을 난 굉장히 낭만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는데, 무지 형식적일 수도 있구나. 기존 곡의 재해석처럼, 파괴에서 복원의 과정을 보여주는, 애초에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원동력이 배후의 리터러시에 있을까? 혹은 소리 구간을 잡아낸 다음 형태로 변환하는 툴처럼, 더 즉물적이지 않을까. 그런 Random이 사람의 손맛으로 느낄 수도 있겠다. 전체적으로는 통제 가능한 통계로 설명 가능하면서 세부에서는 무작위 ; 보는 과정에선 비선형이라고 느꼈지만, 전체에 있어서는 선형이라고 느낀 부분이다.

이 공연에서 이미지만 혹은 사운드만 있었다면? 오히려 따로 놓여져 있다고 했을 때 난 더 좋아보였다. 둘 다 세심한 매력은 있는데, 둘을 섞었을 때는 완성되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테트리스 게임에서는 블럭의 높이가 음의 높이가 되고, 블럭이 사라질 때가 일종의 코러스 역할을 하는데, 좀 더 게임의 속성이 연계되었다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연결점을 잡고 그 아이디어를 구현했다는 걸로 의의를 두자.

유튜브 영상 중에 4분 33초라는 제목으로 음소거 상태에서 마리오 게임의 플레이를 보여준 것이 있다. 음악으로 보면 그걸 난 침묵을 음악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거 말고도 소리라는 개념을 들려주려는 시도였을까? 위의 영상에서 재밌었던 점은 소리가 침묵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알고리즘이 가시화되는 것, 그런 뫼비우스 같은 매력이 있었지.
어쨌든 Tacit은 그 침묵을 어떤 규칙의 형태로 생각한 모양이다. 소리를 생산하는 방식에 더 집중하며, 그래서 오픈소스로 자신들의 작업툴을 공개하기도 한다. 다만 그런 창작과정과 경험과정의 불일치는 무대에서 사람들이 직접 툴을 사용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는다. (취향을 말하자면) 그게 기존 규칙을 깰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사실 지향이 다르기는 하다. 일단 그들은 음악언어와 일상언어를 일치시키려는 시도였으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그 사이에 기계언어가 있다.(그건 26일의 Text@Media fest에서 김중혁 최수환 이세욱이 보여줬다.) 쉬울 지도 모른다고 내가 생각한다면, 내가 선을 그리면, 그에 대해서 의미가 따라올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