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3일 목요일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예경, 1995

대학 말미 타과 수업으로 들었다가 졸업을 못 할뻔 하게 했던 문제의 과목에 교재로 쓰였던 책, 이번에 시골 내려가시 다시 보니 참 재밌다. 교재로 쓰지 않았다면 더 재밌게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교재로 쓰기 전에 한 번쯤은 훑어 본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때는 취향이란 문제에 참 민감해서, 나랑 같은 타입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던 때였다. 저자처럼 너그러운 맘을 가지고 작업자나 시기에 따라 당위성을 배려하는 일 따위 없었다. 어쨌든 도판으로 보니 원작의 스케일이나 텍스처는 별로 실감나진 않지만, 그래도 그들 행위의 의도만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평이란 행위에 대한 입장도 그렇고. (원본을 보고 싶어하게 하는 리뷰로서 최상이기도;)

 

나에게 인상적으로 보이는 흐름은 아는 대로, 보이는 대로, 느낀 대로 그린 사람들의 엉킴이다. 내 취향대로라면 그것들을 투명성과 반성성이라거나, 계산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나눌 수도 있을 거다. 아마 그 사이에 있는 자연은 그 이분법이 모두 막혀버릴 때 새로운 길이 되겠지. 이념이 갑갑할 때, 자연은 해방구가 된다. 반면 감수성으로 혼란스러울 때 자연은 올바른 규범이 된다. 자연을 모델로 삼아야할지, 극복해야할 무엇인가로 여길지... 그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처럼 무심할 수도 있겠고. 최소한 그걸 통해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끝없는 탐구심을 저자는 참 좋아한다. 동시에 그 작업들이 삶의 결을 드러낼 때 감동받는 걸 보며 참 순수한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확고한 애정이란 지각의 균형이 잡혔을 때 발현된다.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준들은 기실 개인에게는 복합적으로 잠재해 있고, 지나간 작업들을 묶어 정리할 수 있고 그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해도 특정 유파의 수확에는 얻는 부분이 있으면 잃는 부분이 있다는 말처럼, 나 역시 문화에 있어서 진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는 현재라는 폭풍이 지나갔을 때 고요한 중심과 부서진 거리의 잔해들로 그 힘을 가늠할 뿐이다. 

 

창작자의 흐름, 창작이라는 행위의 원동력, 그들이 세계를 응시한 방법, 고대로부터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 그것들이 이론이 되고 학문이 되는 과정,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미술가들의 역사라기 보다는 비평의 역사로 더 실감이 난다. 예술이 권력에 기생하며 권력자의 아량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체계라고 생각하면, 이 책의 매력인 너그러움에 대한 삿된 생각일까. 그저 세대차이일지도 모른다. 가령 이 책은 뒤샹 이후의 작업들과 미디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아마 이 책에 담긴 시각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을 통한 예술이기에 그럴 거다. 나도 그 효과를 도매금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기계적인 입장을 이식한다고 그게 꼭 확장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역시 취향 문제겠다. 혹은 자기연민에 가까울 지도.

 

모든 인간이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모든 집단이 각자의 잣대를 주장해도, 여전히 불충분함과 과잉은 남는다. 또한 도구가 사용자의 사고를 결정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예술은 유효하다. 아직 탐구하고 거부하고 정리할 것이 남아 있으니까. 예술가들이 어떻게 기존 세계에 자리를 잡고, 그들 작업이 기존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 일은 부차적이다. 최소한 그들 사후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그렇다. 나는 권력과 종교의 우상이었던 예술을 안다. 또한 지금 창궐하는 우상도 안다. 그러나 나 역시 메타 예술 속에 있으니... 돌아갈 자연이 없으니 배수진 같은 위기감이랄까. 물론 이런 자신을 설명하는 일 역시 부차적일 테지만.

 

현재에 대해서, 교환이 끝나면 잊어버릴 가치에 있어서 퇴로는 강박적인 신념이나 의지 외에는 없는 걸까? 과거에 대해서,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고 재배치하려는 힘은 결국 다른 역사로 반복될 수순인 걸까? 미래에 대해서, 반보 앞서 나가야 한다는 말처럼 그렇게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식이 적합한 걸까? 더는 새로움이 의미가 없다면 과거로부터 선별한 가치들을 흘려보낼 수도 있겠다. 내 글쓰기는 불가능. 나는 학교에서 과거의 기예를 배우지 않았다. 애초에 글을 그림처럼 여겼다고 하면 게임 셋 같은 느낌인데, 그렇다고 그림을 글처럼 여기지는 못할 것 같다. 오히려 반대다. 시는 나에게 거침없이 접근하지만 조심스럽게 표현되겠지만, 그림은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만 거침없이 표현될 거다. 기본자세는 그렇게 잡는 게 좋겠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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