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5일 화요일

소립자, 미셸 우에벡, 열린책들, 1998

 

오랜만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었다. 힘들더라.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 사람 글은 시점이 깨져있는데다가 그것 역시 별로 인간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인간적인 글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다만 이 사람과는 입장이 다르다는 걸 내내 느꼈을 뿐이다. 또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로만 보지 말아달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사실 말미에 보니 그럴만한 근거는 갖고 있었지만 다른 작품은 보지 않아서 이 사람의 문체라고는 확신할 수 없겠다. 물론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사소한 거라면, 외양의 묘사 대신에 문화적인 코드나 상품 카달로그에 붙은 가격으로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 같은 것? 가계도라거나 물질성과 같은 기존 세계의 개념으로 이야기를 형성해나가지만, 어느 순간 참았던 작가적인 본심이 터져버린다는 것? 그게 나쁜 타이밍은 아니라서 재밌게, 라기 보다는 흥미롭게 보았을 테지만, 하지만 그 조차도 의도된 약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별로 이 사람의 진심은 알기 어려운 글이었다. 어느 비평가가 이 소설에 비하면 다른 소설들은 유치하다는 뉘앙스의 문구를 책 표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 말대로 시점의 거리가 꽤 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폴 오스터 이후의 감수성으로 현실을 푸코식으로 재해석하여 대체 미래를 그린 이야기로 느껴졌지만, 아마 읽는 사람마다 각자의 세계관에서 이야기 속으로 진입할만한 입구는 많이 열어놓은 장점은 있을 거다.

 

다만 그게 그 비평가 말대로 거대함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라는 쪽에 가깝다. 확실히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68 이후의 세대의 -  나는 누벨바그 영화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꽤나 좋아하던 그 세계의 후예의 - 성장이고, 그들이 거쳐나간 과정을 폴 오스터의 문팰리스가 미의식만으로 극복해버린 현실이라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할 때 그걸 개인적 차원이 아닌 누구에게나 대입 가능한 공식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로 보여줬지만, 공감은 되지만 인정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이 이야기가 허접하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는 별 필요 없다는 말이다. 내가 이걸 토대 삼아서 새로운 글을 쓰려고 하는 건 아닐 테니까. 나 역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아름다운 의지에 속하고 싶었고. 쾌락이 천박하게 소모되는 걸 혐오하면서도, 그 감각이 단순히 스타일만으로도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욕망에 솔직해야 할 것을 말하면서도, 스스로의 욕망을 죽이려 애썼기도 하고. 그러나 니체나 보들레르나 사드에서 출발한 작가를 만나서 반갑기도 했고, 또 작가의 시점을 구현하는 체계라면 약간 반하기도 했다. 내가 소설을 못 써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꿈이라던가 사회이론 들먹이는 건 지겨웠지만, 그런 거슬림을 감싸는 작가의 시선은 참 어지럽게 자연스러웠다. 수식적인 아름다움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보다는 은밀한 의지가 살아있다고 느꼈다. 두 인물이 각기 두 손전등이라면, 그걸 가지고 밤길을 헤매는 누군가의 앞에서 안전하게 걷고 있는 느낌 ; 그런 지배받고 싶은 마음을 자극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여기서 나는 이 글이 그런 지배 상태에서 독자를 쫒아내려는 의도로 작중 인물을 파괴시키면서 작가가 부각한 가치를 독자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드는 글쓰기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음... 그건 내가 읽은 다음에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기억이 났을 뿐이고, 실제로 이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냥 술술 읽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 세계는 시마다 마사히코가 자기파멸적으로 부정한 세계였지만, 여기 인물들은 그럭저럭 사회 속에 숨어들어 잘 살아가더라. 현실로 말한다면 나 역시 이쪽이지만, 이상이라면 역시 저쪽이다. 그게 나에겐 거슬렸을 거다. 이 정도까지 구차하게 해야돼, 그런 느낌? 삶에서 내가 욕망을 완수하기 보다는 양식을 구현하는 쪽에 지금은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섹스가 욕망을 대변할 수 있다는 걸 난 더 이상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작가의 입장이라면 난 욕망은 섹스를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아라는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을 약으로 제거한 다음에야 행복해하는 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반대는 종교적인 세계가 될 거다. 죽음까지 능가하려는 욕망은 이 책에서 실현된다. 물론 그건 우리에게 익숙한 정신적인 종교는 아니지만... 과학적인 토대에서 출발하여 천국까지 실현한 종교라고 할까? 그걸 작가가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난 더 코어한 쪽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련다. 이 이야기에서 그게 단백질의 분자구조였다면 나에겐 감각, 그러니까 전기자극이다. 몸 전체가 크로이체 소자로 뒤덮인 인간이라... 그러면 더 민감해질까? 단순히 정보의 양이나 자극만으로 쾌락이 결정된다면, 현재의 이미지는 단지 그게 그 기제들을 권력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라 그럴까? 난 받아들이는 입장이 더 먼저고, 그건 단순히 소화기관처럼 정렬하면 충분한 게 아니라,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 감각을 재현할 코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이야기의 체계를 맘에 들어한 이유는, 그게 현실에 있어서 실천 가능하기 때문일 거다. 하긴 벌써 2009년이 끝나간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새로운 사상이 이미 나왔어야 하나? 그런 식으로 현실이 진행될까? 우리에겐 더는 도플갱어에 대한 공포가 없을까. 개인이나 자유를 중시하는 것은 그저 자본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런 권력의 작동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아닐 것 같다. ...어쨌든. 나에게 이 책의 미래를 긍정한다면, 그건 호기심이다. 나에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감정. 사물에 호의를 갖지 않은 채로도 기다릴 수 있는 그 감정을, 나는 동일성이나 잘 작동하는 양식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특정한 규칙이 필요할까. 그러자면, 그걸 말하려면 긴 이야기가 필요할 거다. 지금에 있어서는 이 사람만큼이나 실천 가능한 어떤 양식과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다르다는 것만 확신한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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