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4일 토요일

파주, 2009, 박찬옥.

영화를 필름이 뇌수에 스며든다고 표현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영상문법(?)에 대해 신비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말은 영화가 심상이나 서사를 그리고 감각과 기법들을 종합적으로 전달하는 매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제 파주를 보며 그 말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물론 정치적이거나 섹슈얼리티 차원에서 읽어낼 수 있고,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담화와 행위와 포착된 장소의 이야기들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건 영화 내에서 이용 가능한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걸 목표로 하기에는 너무 불편하다. 자기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걸 애써 현실과 같은 거라고 혹은 현실을 능가하는 영화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기세가 없다.


모든 것이 용납될 것만 같다. 고전영화가 연상되는 ; 저예산삘(...), 오프닝의 촌스러움, 후시녹음한 것만 같은 목소리 등등의 레트로 감수성. 신화의 알레고리 ; 오이디푸스(혹은 그 딸)든 메시아든. 소녀라는 아이콘 ; 앨리스든 안드레센이든 심지어 베레니체든. 정치적이거나 철학적인 떡밥들... 따위가 뭐가 중요한데? 그것들이 논리나 이미지 혹은 감각 등 무엇에 근거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똑같이 기제로서 작용한다.


나에게 영화를 보는 경험은 권력에 지배 받는 것과 같다. 모든 게 용납될 것 같지만, 이미 예상된 것만 용납된다. 이 영화는 규칙에 무심하다. 위악적인 제스처조차 없다. 무심하게 유희하고, 집착은 해도 죽이지는 않는다. 제스처라는 건 실행자에겐 지속적인 움직이지만, 경험자에겐 순간적인 이미지다. 이제 나는 거기에 논리나 형태의 일관성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 사적인 리얼리즘이 잘 구현된 비유로서, 지금은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여기고 있지만...


영화를 경험하던 당시에는 마치 무서운 영화에 눈을 감아야 하는데 장면을 놓칠까봐 눈의 깜빡임조차 계산하며 보는 듯이 자신을 억누를 겨를도 없이 끌려다녔다. 첫인상은 불편한 영화였다. 그건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1/3 이후로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보게 되었다. 간만에 감정의 선에만 빠질 수 있었다. 플롯이나 영상의 기교가 좋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데, 그조차 그냥 이 영화에서는 코드일 뿐이다.


오히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코드와 영화 내에서 발견한 코드들이 연결되고,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 코드들이 서사로 구축될 때, 나는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어떤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위안으로 삼게 된다. 코드는 벽돌이다. 그걸 모아서 벽을-형태를-쌓는 것은 나. 그러나 난 그 벽을 손끝으로 스치면서 지나간다. 그 미로에서 난 그렇게 출구를 찾으려 한다(혹은 내 행위가 패턴이 되길 바란다). 난 영원히 돌고도는 이야기를 믿고 싶지 않다(아니게 되면 감정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영화의 특별함이라면 날 그토록 감정에 매달리도록 몰아붙이면서, 과정에 겉멋이나 집착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감정에 매달린 상태로 지나쳐버렸던 코드들을 재차 확인할 필요성이 없음에도, 그게 인간의 치유나 출구를 찾는 시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언제든 재구성될 수 있는 현실은 달라졌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게 현실체계를 그대로 반영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난 그저 스크린과 나 사이의 긴장감이 좋았다. 끊어지기 직전까지 당겨진 그 실 위로 감정이 흐른다. 이 영화는 내가 생략법으로 말하는 감정들을 복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느낀 감정, 그 인간이 진짜 나는 아니고, 내가 느낀 감정이 다른 누군가가 만든 인간이고, 그 인간을 편집한 필름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녀는 춤 출 수 있다. 그때 나에게 생략된 프레임을 채우기 위해서 눈물이 필요했다. 그러면 진짜 살아있다고 느낄지도 모르니까. 최소한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겠다고.


그저 이 영화에서 끝까지 나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는 권력에 대한 애교였을지도 모르지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