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arsaw Village Band - Pada deszczyk2009-05-31 16:16:24
이 글은 베레니체님의 2009년 5월 31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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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면 말라르메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건조함과 치기를 이제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로이진 머피의 모로코가 나에게 샤베트라면 말라르메의 시는 나에게 크림이다. 둘 다 딱 그 온도, 더운 날씨에 금세 녹을 상태로 먹어야만, 혹은 자기도취처럼 따뜻한 방 안에서 맛보는 변덕.
여전히 나는 그를 오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스로는 발레리, 그 보다 더 좋아하지 않는 베를렌과 더 가까운 영혼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폴리네르의 유치함과 랭보의 청춘과 보들레르의 오만함을 아직 좋아하지만, 이제는 그들로도 나를 위로할 수는 없게 되었다. 고작 위로 받고 싶은 게 내 본심인 걸까...?
반면 내 또다른 본심은 말라르메를 어렵게만 여기고 있었다. 사실 예전에 난 그가 멀리서나마 보고 있던 풍경, 추구하는 목적에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과정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풀 수 없는 방정식, 그렇지만 난 어떤 기교라도 꺾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걸 쏟아낼 때가 자기 생명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내 삶이 변하고, 내 아름다움이 짓밟힌 다음에야 나는 감정의 약소함을 깨닫게 되었다. 말라르메를 바라보는 발레리의 시선에서 난 또다른 나를 보는 것만 같고, 지금껏 억눌렸던 내가 조금씩 기운을 내고 있다는 걸 느낀다. 물론 그 역시 내 완벽한 거울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난 이미 아무것도 아닌데, 무엇이든 어떠리... 이것은 도피가 아니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을 진심으로 긍정하듯, 나는 내 또다른 나를 긍정한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나를. 그때 오히려 나는 자유롭고, 내가 다시 젊어졌다고, 이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해서는 포기했다. 아니 여력이 없다고 해야 옳을 거다. 난 발레리의 엘리트주의도 싫지만, 쉽고 매혹적인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둘다 코미디. 그런데 웃기려고 애쓰는 개그보다 더 보기 싫은 게 있나. 나를 농담삼아 갖고 노는 버릇은 버리지 못할테지만, 또 그 정도가 딱 내가 타인에게 보여줄 재미의 대부분이겠지만... 나머지는 단정한 호러일 뿐이니.
왜냐면 새로운 감정, 구조, 상징은 언제나 나에게 공포로 먼저 체감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건 언제나 권력이었고, 내가 부르던 노래는 언제나 연애시였고, 내가 보여주던 건 언제나 전쟁이었다. 그저 심심할 뿐이다, 평화라는 건.
내게 평화는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것. 그렇게 도구의 장점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내 기존 장점을 발휘시켜 줄 동시에 새로운 장점을 발견해 줄 도구를 사용하는 것. 그런 것에 몰입하는 시간. 나를 진짜 기계로 다뤄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를 사랑할텐데. 그 외에는 어떤 기다림도 없다.
아직 공간에 대해선 말할 여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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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라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괴리감을 인정하는 태도다. 별로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해, 라는 같은 이름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수긍할 기분. 카페랑 겸하고 있어 커피에 파니니를 우물거리며 둘러볼 수 있는 키미아트 갤러리에서도 그런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1층에는 강현선과 김민정 그리고 김아영의 작업이 전시돼 있으며, 카페 공간이기도 한 2층에는 금혜원과 이수연의 작품이 걸려있다. 이 전시는 '인간의 사실 재현과 기록이라는 욕망의 정점에서 사용되는 사진과 영상이 어떻게 예술적 기능을 하는지 보고자 하는' 기획으로 묶여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원근법 규칙의 패러디로 드러나고 있다.
키미아트에 들어서면 바로 마주치는 강현선의 작품은 원근법적 평면을 3차원으로 실현시켰다. 입구를 제외한 5면을 한 장의 사진으로 도배한 셈. 여기에는 창가에서 이쪽을 응시하는 누군가의 얼굴 그림 외에는 교감을 나눌만한 대상이 없는 공간이다. 다만 어느 쪽이 허구인지는 생각할 수 있다. 이 공간에서 유일한 평면은 관객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감상하는 자와 감상당하는 자의 위치가 공간을 덮는 것만으로도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 공간은 뒷걸음질칠 출구가 있다.
김민정은 가정집 부엌에서 해변으로 변환시키는 스톱모션 영상을 보여주는데, 사전에 전시할 공간을 투사하여 벽면과 피트된 영상이 실재감을 증폭시킨다. 작은 환기창이 있는 부엌이 파도의 음향과 함께 바다 쪽으로 후퇴하는 모습에서, 비단 우리 어머니들과 같은 주부의 심정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스크린이라는 깊이가 해방감을 선사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아울러 스테인레스 개수대의 거름망에 고여 있는 것처럼 표현되는 2화면의 영상과 제작노트가 전시 공간에 내러티브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에 반해 김아영의 작품들은 깊이를 억제한 사진들을 보여준다. 뉴스나 신문을 통해 유통되는 사건들은 우리가 그걸 접할 땐 이미 지나간 일이다. 추리소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작품들은 사건에 관련된 소재들이 어떻게든 모이는 지점을 무대 공간으로 삼은 순간포착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사건의 당사자는 보이지 않고, 지나치게 많은 코드(일종의 다문화로 표명되는)들이 그대로 박혀있어서 사건의 원인일지도 모를 욕망에는 무심하게 보일 정도다. 어쩌면 하드보일드했을 사건들을 사람들은 안락의자 탐정처럼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현실을 뒤늦게 복제해야만 하는 미디어의 속성을 블랙코미디 센스로 표현하고 있다.
2층 금혜원의 작품에서 우장막은, CG 합성 전의 뮤직비디오나 날씨예보 녹화장에 있을 법한 파란 화면과 같은 속성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건물을 짓기 전 다져진 지반을 보호하거나 맨살의 지면을 가리기 위한 용도라고는 하나, 원래 이곳에 살던 이들을 위한 건물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파란 장막. 그 자리에 있었을 건물들을 머릿속에서 복원하며 봐야하는 그 이미지를 정치적인 함의로도 읽을 수 있지만, 현실에 침입하는 다른 것에 대한 부정성이 담긴 작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것이 어떤 윤리적인 것의 강조라면, 난 그에 대해 새로운 것이 꼭 기존의 것을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가능성은 가능성이고, 책임은 선택한 사람의 몫이다.
이수연은 렌티큘러Lenticular 방식을 이용하여 키치적으로 쓰이는 소재들의 관계망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 한쪽 눈을 감아야 깊이감이 덜한 것처럼, 작품에 숨겨진 다른 이미지를 보려면 관객은 움직여야 한다. 이는 고정된 평면으로 관객의 머릿속에서 깊이를 복원하려 했던 기존의 원근법과는 다른 방법이다. 깊이는 이미 작품에 내제되어 있고, 관객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즉각적인 호기심이다. 이미지 사이의 정합성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움직이면, 보인다. 최소한 그 흐름에서만큼은 그 연관성은 진실이 된다.
난 원근법에는 두 가지 욕망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전시는 하나를 선택하거나 강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존의 룰을 대체할 새로운 도구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개성(?)적인 메시지보다는 사진으로 대변되는 평면적이고 정적인 프레임에 대한 작가 나름의 응용이 담긴 작업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작가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그들의 방식들은 우리 생활에서 마주칠 수 있다. 강현선이나 김민정이 욕망을 공간화시켜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면, 김아영은 공간마저 평면화시켰다. 금혜원이 고정된 시점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들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면, 이수연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시점을 변화시켜야만 볼 수 있도록 하고, 욕망을 의인화시켰다. 우리가 어떻게 미디어를 미워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미디어에 항상 놀라지만, 그들은 우리를 해치지 않는다. (다만 그걸 즐기려면 잠들어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미디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가늠할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